아들의 재롱잔치가 있었던 날,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1년 반이 넘도록 유치원 가기를 싫어했던 데다,

1월생이다보니 또래보다 하는 게 뭐든지 어리고 늦어서 ..

같은 반 친구 중에도 1, 2월생이 몇 명은 있어 그걸 위안삼기도 했는데

그 아이들이 또래보다 월령수가 어린 것과 상관없이 유치원 적응, 바른 생활습관,

지적 발달 등 대부분의 유아기의 과업을 순조롭고 빠르게 달성해가는 걸 지켜보니,

"우리 아이는 생일이 늦어서..."식의 핑계를 더 이상 대기 힘들었다.


재롱잔치 날에도 

고집이 센 아들이 정해진 의상을 입지 않는다고 떼를 쓰거나 해서

선생님을 곤란하게 하진 않을까..  자신이 가진 능력에 비해 자존심만 너무나 강한

아들이 혹 무대 위에서 실수라도 해서 울다가 결국 퇴장하는 일이 생기진 않을까 ..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다.

다른 반 아이들의 깜찍한 춤과 연극이 끝나고 드디어 아들의 차례가 왔을 때,

커튼이 열리며 남성성을 물씬 풍기는 웅장한 음악이 깔리자(아들의 애창곡, 울트라맨)

몇몇 남자 아이들이 서 있었는데

엄마인 나는 너무 긴장한 탓인지, 아들이 어느 위치인지 알아보질 못했다.

그때, 남편과 딸의 놀라고 다급한 목소리 -  "센터야!!!!"

응?? 뭐??   무대를 다시 자세히 보니, 아들은 정말 여러 아이들 중에 제일 앞자리,

그것도 한 중간에서 댄스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강하고 멋진 울트라맨을 표현하는 춤인 만큼, 비장한 표정에 야! 으아!같은 기합을 넣어가며

5살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근사하게 무대를 빛내고 있었다.


DSCN2419.JPG

공연 도중, 많은 관중 속에서 엄마를 발견했는지,
씩- 웃으면서도 모른척하며 계속 공연에 집중하는 아들을 보니
가슴이 뭉클 ..  순식간에 아들 바보가 된 나는 눈물콧물을 동시에 훌쩍였다.
옆자리의 남편을 슬쩍 보니, 그도 아빠 미소가 흠뻑 번진 얼굴에다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 핸폰으로 아들을 찍느라 바빴다.
내가 팔로 남편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웃으니, 남편도 마주보며 웃더니
"신이 이 녀석, 젤 중간에서 한다고 미리 말해줬으면, 더 앞자리에 앉는건데 말야."
아쉬워하면서도 흐뭇한 표정이었다.
다시 무대 위를 보았다.
아직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통통한 얼굴로 친구들 사이에서
춤을 추며 여유있게 무대를 즐기고 있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지난 5년여의 시간이 꿈만 같았다.

IMG_2924.JPG

혼자 힘으로는 제대로 앉는 것도 할 수 없었던
아들 모습이 엇그제 일 같기만 한데.
어느새 이렇게 훌쩍 자랐다니..

DSCN2417.JPG

댄스 공연이 끝나고 합창 시간에는 <토토로> 주제가를 씩씩하게 부르며
의젓한 모습으로 같은 반 친구들과 호흡을 맞추었다.
많은 친구들 사이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함께 하는 순간을 즐기면서
그동안 유치원에서 배운 실력을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있게 펼쳐보이다니.
재롱잔치를 끝내고 아이들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다른 엄마들이 내 주변으로 다가와
"신군, 너무 잘하더라. 신군밖에 안 보였어. 그새 너무 듬직해졌더라~."
그저 예의상하는 말인지 알면서도 내가 받은 감동이 객관적으로도 증명되는 것만 같아
뿌듯한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유치원을 나와, 할머니댁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아들에게 물었다.
"신아, 무대 위에 섰을 때 어땠어? 안 떨렸어?"
"아니~ 기뻤어!"

아들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운전하던 남편과 나는 다시 마주보며 흐뭇+대견..
얼마전 내가 병원에서 피가 모자라단 진단을 받고,
안 그래도 바쁜 연말을 꽉 찬 병원순례 일정으로 보내야 해서 걱정과 부담이 많았던 차에
엄마아빠를 위로라도 해주려는 듯, 아들이 이번 재롱잔치를 통해 부쩍 성장해줘서,
이렇게 올 한해를 마무리할 수 있어서,  너무너무 마음이 놓인다.
이만큼 키우고 나서야 고장이 나기 시작한 내 몸마저도 고맙고 다행스럽다.


DSCN2438.JPG


시아버님이 몸이 좀 안 좋으셔서 재롱잔치에 참석은 못 하셨지만,

따뜻한 집밥을 차려두고 우리를 기다려주신 시댁에 도착해 누나가 열심히 찍어준

비디오를 할머니, 할아버지와 다시 돌려보며 즉석에서 댄스공연을 또 보여주었다.

짧은 팔다리를 온 힘을 다해 움직이는 어린 아이의 순수하고 사랑스런 모습을 보며

가족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크게 웃고, 따뜻한 저녁을 함께 했다.


키우기 힘든 아이, 쉬운 아이는 따로 있는 걸까.

이 물음에 '키우기 힘든 아이는 분명 있다'고, 주관적이지만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는

대답과 고백을 나는 하고 싶다.

소아정신과 전문의 서천석 선생님이 언젠가,

"아이들 때문에 부모가 점점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 고 하셨는데

아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내가 정말 그렇게 되어가는 건 아닐까, 두려운 때가 많았다.

많은 부분이 나아지고 성장했지만, 여전히 아들을 키우면서 풀어가야 할 숙제는 많다.


지금보다 더 어렵고 곤란한 일을 많이 겪을 수도 있겠지만,

이번 재롱잔치 덕분에 좀 더 즐겁게 그 숙제들을 맞이할 준비가 된 것 같다.

다른 아이들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믿고 기다려주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

온 힘과 정성을 다해 춤을 추는 아들이 나에게 그렇게 외치고 있진 않았을까.

"엄마! 잘 못한다고 실망해서 고개돌리지 말고, 끝까지 나를 봐주세요."


신아. 이번에 네가 엄마에게 정말 중요한 걸 가르쳐 줬구나.

고마워..  새해부턴 좀 더 느긋하게 지켜보고 기다릴 줄 아는 엄마가 되도록 노력할께.

그동안 크느라 너도 애썼다.

엄마의 아이돌, 우리 아들, 많이많이 사랑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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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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