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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아주 가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에 

알록달록 색종이 가루가 내 머리 위에 쏟아지는 듯한 날.

어제 하루가 내겐 그런 날이었다.

베이비트리를 통해 알게 된 lotus님과 몇 달을 벼르다 드디어 처음 만나게 된 날.

집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그녀의 '초록 집'을 찾아가는 길은 작은 여행과 같았다.


사실 내겐 온라인을 통해 만난 사람과 이렇게 직접 만나는 건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지만,

아이를 키우며 겪는 외국살이가 때론 귀양살이같아서,

간만에  마음 통하는 사람이 생기면 버선발로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기로 약속해놓고는 이런저런 소심한 걱정들이 앞섰는데..

'만나기 전에 살을 좀 더 빼야하지 않을까?'

'온라인에서는 드러나기 어려웠던 나의 허술한 점들을 눈치채면 어떡하지?' ...


하지만, 마흔이 넘어 좋은 건, 삶의 작은 모험들을 이젠 크게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거다.

이렇게 사람사귀기가 무서운 세상에, 온라인에서 나눈 글만으로도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니.

알람을 평소보다 일찍 맞춰두고 일어난 아침, 아이들을 학교와 유치원에 보낸 뒤

그간의 망설임을 비웃으며 씩씩하게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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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3살 아이와 아직 돌도 지나지않은 아기를 키우며 날마다 고군분투중인

그녀가 차려준 점심! 대파만으로도 이렇게 달콤한 야채맛을 즐길 수 있다니. 한 수 배웠다.

오랫동안 푹 잠들어준 아가 덕분에, 오랜 수다를 모국어로 풀 수 있었던 달콤하고 꿈같은 시간.

남 사는 거 듣고보는 것만큼, 즐겁고 유익한 공부가 또 있을까.

돌아오는 길에 어린이집에 들러 만난 그녀의 큰아이 손을 잡고 전철역까지 걷는 동안,

뭔가 가슴이 뭉클했다.

7년 전, 뭐가뭔지 몰라 날마다 노심초사, 우왕좌왕했던 어설픈 나의 초보 엄마 시절이

새삼스럽게 떠오르고 그동안 겪었던 수많은 일들이 잔잔한 물결처럼 마음 속에 일렁거렸다.

평생 모른 채로 지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떤 한 공간을 계기로

낯선 나라에서 만날 수 있다니. 그것도 같은 '아이 엄마'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앞으로 이어질 육아의 날들은 생각보다 더 험난할 지 모른다.

하지만, 아주 가끔이라도 오늘같은 공감과 만남이 긴 육아의 골목골목에 숨겨져 있다면

한번 해볼만 하지 않을까.


그저께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집, 맞은 편 집 아주머니댁은 중년 부부 두 분만 조용하고 단촐하게 사신다.

그런 집 앞을 우리 둘째가 유치원만 갔다오면 친구랑 고함고함지르며 놀지를 않나,

자전거에서 스쿠터, 장난감 자동차까지 온갖 발통달린 것들을 굴리며 노는 탓에

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사과밭에서 따온 사과를 몇 알 드릴까 말까

망설이다가(아직 이사온 지 반년정도라 서먹한 이웃에게 뭔가를 가져가면,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에라, 모르겠다!싶어 그냥 벨을 누르고 가져다 드렸다.

그랬더니 두 분이 함께 현관까지 나오셔서 너무 반갑게 맞아주시며 고마워하셨다.

그렇게 집으로 다시 돌아와 잠시 있으니, 우리집 벨이 울리고

맞은 편 집 아주머니께서 손수 만든 과자라며

아이들과 먹으라고 내 손에 들려주시며 하시는 말씀,

"아휴, 진작 주고싶었는데 망설이기만 하다가 기회를 놓쳤지 뭐야. 사과 고마웠어요."

아! 사람 마음은 다 비슷한가?!  

먼저 손내밀까 말까 망설이고 기회만 엿보다 그냥 포기하거나, 타이밍을 놓치게 되는..

이웃과의 관계는 참 그렇게 되기 싶다. 한번 시도했다가 참담한 실패를 겪을지도 모르지만

먼저 시작하는 용기가 늘 좋은 이웃을 얻게 하기도 한다.


온라인에서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lotus님과의 만남이 그걸 다시한번 증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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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집에서 담은 된장.

서로 다른 재료로 두 통 담았더니, 색깔도 맛도 서로 다른 된장으로 무르익었는데

요즘 된장국은 이 두 종류를 섞어 끓여먹고 있다.

하나의 된장맛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맛의 조화와 차이가 있는데

사람 관계도 이랬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서로 다르지만 그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연습, 혼자 있을 때보다 둘 이상 다수가 함께 했을 때

더 성숙하고 무르익은 맛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리아야, 가람아, 아줌마네 집 된장 얼른 먹으러 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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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거둔 나팔꽃 가지는 더 야성적이고 무성한데 아마 화분이 아닌 땅에서 키워 그런가.

이 가지로 이쁜 크리스마스 리스를 만들어 손님맞을 준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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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들 돌보느라 힘들었을텐데,

따뜻한 정성과 마음으로 처음 만나는 저를 맞아주신

lotus님,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연이 있게 해 준 베이비트리도 고맙습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어 쉽게 만나기는 어렵지만,

댓글로 따뜻하고 유쾌한 소통을 해주시는 많은 분들도 늘 고맙습니다.

서로 다른 자신만의 육아월드를 만들어가는 다양한 이곳의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어 갈까요?

그리고 새해에는 또 어떤 새로운 이웃을 만나게 될까, 벌써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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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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