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전철 MRT(Mass Rapid Transit) 도비가트 Dhoby ghaut 환승역.
도비가트? 역 이름이 낯설지 않다.
인도를 여행할 때 뭄바이에서 보았던 ‘도비가트’가 떠올랐다. ‘도비’는 인도에서 세탁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하며 ‘가트’는 강변의 둑이나 계단, 빨래하고 물놀이도 하고 푸자(힌두교의 종교 의식)를 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도비가트라는 말은 ‘강가의 빨래터’라는 뜻.
뭄바이의 도비가트는 세계에서 가장 큰 빨래터, 단순한 빨래터가 아니라 카스트제도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가촉천민들의 일터다. 거미줄처럼 얽힌 빨래줄에 수많은 빨래가, 각양각색의 옷들이 널려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나는 빨래 사진을 많이 찍는다. 여행하면서 길을 가다가 주택가에 빨래를 널어 놓은 모습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꼭 셔터를 누르곤 한다. 빨래가 있는 풍경이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꾸밈없이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다.
뭄바이 도비가트는 빨래 사진을 찍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지만 사진을 찍는 것이 그리 즐겁지는 않았다. 그곳의 수많은 빨래가 인도에서 만난 충격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눈길만 마주쳐도 재수 없다 한다는 불가촉천민, 체념인가, 극복인가, 한줄기 염치도 없이 당당하게 구걸을 하는 수많은 거지, 그들의 열악한 생활상... 동정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인도를 여행하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인간의 숲’, 인도,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이 참 당혹스러웠다.
도비가트 Dhoby ghaut 역의 이름은 인도인들이 싱가포르에 이주해온 초기에 이곳에 도비 가트가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지만...
말레이시아에서도 도비 케다이 (Dhobi kedai ; kedai는 말레이어로 가게란 뜻)라는 간판을 종종 보았다. 빨래방, 세탁소를 뜻하는 말이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여행하며 인도를 떠올린다. 책을 읽다가 이해할 수 없어 덮어 두었던 것을 다시 펼쳐보는 느낌이다.
이해되지 않던 구절이 시간이 지났다고 저절로 그 뜻을 알게 되지는 않지만
처음의 충격이 가시고 나니 익숙해지고 편해지고, 나아가 친해지는 느낌이랄까.
싱가포르 4일째,
아침을 먹고 게스트하우스 라운지에서 한가롭게 노닥거렸다.
아루는 뭔가를 계속 그리고 오리고... 해람이는 소파에 누워 TV 시청. (싱가포르에도 한류의 열풍이 대단하다. 여러 채널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여주는데 중국어 더빙이라 낯설고 웃긴다.)
오늘은 좌린 스타일~로 보내는 하루. 아무런 계획 없이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가 보기로 했다.
Sri srinivasa Perumal Temple.
게스트하우스에서 패러파크 전철역 가는 길에 있는 힌두 사원, 일요일이 되니 평소보다 사람이 많다. 전통 의상을 차려입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단정하게 빗어 넘긴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인도에 갔을 때 처음 힌두 사원을 보고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심경이 복잡했다. 사원의 신상은 무척 조잡해 보이고 우스꽝스러우며 무섭기도 하고 하여간 내가 알던 신성함, 엄숙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현란한 색깔, 불빛, 무언가를 바르고 몸으로 하는 행위들... 사람들의 모습은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다.
패러파크 역을 지나 리틀 인디아, 인도인 구역으로 계속 걸었다.
전단지를 나눠주며 호객행위를 하는 큰 길가의 식당을 피해 골목길로 들어가 허름하지만 인도인들로 북적이는 식당을 찾아냈다. 여행자들이 아니라 인도 이민자, 이주 노동자들이 주로 찾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 식당을 고르는 기준이 있다면,
호객행위를 하는 식당, 관광객에게 잘 보이려고 꾸민 곳은 피한다, (비싸고 때로는 맛도 없다.)
현지인이 많은 곳이면 OK!
의자가 플라스틱이면 틀림없어요, 누군가 한 이야기에 100프로 동감.
역시나 메뉴판이 없는 이 작은 식당에 인도인들로 북적이는 풍경이 마치 인도에 온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인도 여행을 추억하며, 이것저것 시켜서 배불리 먹었다.
낯설고 당황스러웠던 인도의 첫인상은 여행을 하면서 조금씩 누그러졌고 그들의 음식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들의 방식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고 사리와 펀잡 드레스를 입어 보고 싶어 옷가게를 기웃거리고 그들 특유의 억양과 몸짓을 흉내 내면서 차츰 가까워졌다.
그리고 오늘
매끈한 고층 빌딩, 식민지 시대의 빛바랜 서양식 숍 하우스들 속에, 도심 한가운데 서 있는 힌두사원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저기, 저기!!! 바퀴 세 개 버스야!!
싱가포르에서 해람이가 가장 해보고 싶은 것은 이층 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재미삼아 이층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층버스 대신에 버스 두 대가 기차처럼 연결된 굴절버스가 먼저 왔다. 이 버스의 이름은 이제부터 바퀴 세 개 버스다. 바퀴가 여섯 개인데 옆에서 보면 세 개만 보이니까
“이층 버스는 타보니까 시시했어. 나는 바퀴 세 개 버스가 훨씬 좋아.”
이층 버스와 굴절 버스를 모두 타고난 후 해람님의 평가. 내 보기엔 그냥 다 같은 버스던데.-_-;;;
바퀴 세 개 버스의 종점, 팬퍼시픽 호텔 앞에 내렸다.
지도를 보니 근처에 쇼핑몰이 보이기에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그리로 향했다. 날씨가 무더워 조금만 걸어도 숨이 헉헉 막혔다. 일단 시원한 곳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엄마, 과일 주스 사줘.
나는 오렌지, 아니 파인애플
나는 드래곤 푸릇!!
엄마, 드래곤 푸릇 꼭 사줘야 해!!
나는 파인애플 주스!!!
내가 무더운 날씨에 정신줄을 놓아 버린 것을 눈치챈 아이들이 양쪽에서 스테레오로 조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몇 미터만 가면 쇼핑몰이 있다, 에어컨 바람 쐬면서 정신을 차려보자, 는 일념으로 꿋꿋하게 버티며 앞으로만 돌진했는데 쇼핑몰 입구에서 과일주스 가게를 딱 맞닥뜨렸다. 항복! 파인애플 주스와 드래곤 푸릇 과일을 하나씩 안겨주고 나니 아이들이 금세 잠잠해졌다.
내가 아이들과 주스 가게에서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하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겠다던 좌린이 돌아왔다.
우리, 저기 옥상 정원에 올라가 볼까?
좌린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건물 밖으로 계단이 있고 꼭대기에는 초록색 나무들이 있었다.
글쎄...
무더위와 아이들에게 시달리다가 이제 겨우 숨을 고르고 있는데 계단을 올라가자고 하니 한숨이 절로 났다.
나: 옥상에 정원이 있대?
좌린: 모르겠는데 나무들이 보이잖아. 밖으로 계단도 있고.
나: 정원이 있으면 실내에서도 올라갈 수 있게 해놓지 않았을까? 그리고 옥상에 정원이 있다면 안내 표지판도 있을 것 같은데...
올라가 보면 알겠지, 당장 계단으로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 보자는 것을 좀 더 알아보자고 설득했다. 그리고 쇼핑몰에 들어가 여기 옥상에 정원이 있는지, 옥상까지 어떻게 갈 수 있는지 물었더니, 그냥 나무를 심어 놓은 것이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간은 아니란다.
거봐,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갔으면 헛수고 할 뻔 했잖아.
정원이 아니면 어때? 가보고 정원이 아니네, 하면 되지.
그래도 한 마디도 지지 않는다.
아빠, 우리 옥상 공원에 가자!
이번에는 해람이가 조르기 시작했다.
잉? 옥상 공원?? 건물 위에 나무들이 있는 걸 보고 남편께서 ‘정원’이 있다 하시더니 ‘정원’이 아니라 하니까 아드님께서는 ‘공원’이라 하시는구나!
공원이 아니라고, 계단을 끝까지 올라가도 옥상에 들어갈 수 없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가 보자~!
두 남자의 호기심은 해결이 되지 않아 결국 둘이서 밖으로 나가 계단을 올라가고 나와 아루는 쇼핑몰 벤치에 앉아 쉬었다.
초가을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쉬겠다고 선언하고 이부자리에 누웠는데 좌린이 애들과 자전거를 타고 한강에 간다고 했다.
그래, 잘 다녀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점심은 어떡하려고? 지금 열한 시니까 한강에 가면 열두 시, 한 시 되는데... 물병은 챙겼어? 애들 모자와 바람막이 점퍼는?
결국엔 내가 일어나서 먹을거리와 필요한 것들을 챙겨 주었고 그러다가 나도 그냥 한강까지 따라갔다.
너는 그런 생각을 어떻게 미리 다 해? 나는 그런 생각이 잘 안 떠오르는데... 그래도 애들 점퍼는 챙겼어. 그것만 해도 큰 변화지?
멋쩍어하는 좌린의 말에 웃음이 났다.
예전에는 이런 걸 두고 많이 다퉜는데, 왜 미리 생각하지 못하냐고, 챙기지 않냐고 타박을 하고 그러면 좌린도 지지 않고 꼭 그렇게까지 미리 챙겨야하냐고 맞섰는데, 이제는 둘 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계단을 오르다가 막혀 있어서 꼭대기까지는 못 갔단다. 계단에서 담배 피우는 인도 아저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왔단다.
거봐, 내 말이 맞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핀잔을 삼키고
내가 우리의 다른 점에 대해 생각했다고, 나는 계단이 보이면 올라가도 되는지, 올라가면 뭐가 있는지, 물어보고 알아봐야 하는데 너는 일단 가 봐야 하니 참 다르다고 이야기했더니 좌린이 웃으며 말했다.
“너는 자유 ‘계획’ 여행자, 나는 자유 ‘도보’ 여행자!”
나: 우리 이제 클락키 역으로 갈 건데 전철타고 갈까?
좌린: (0.01초의 주저함 없이) 응!
나: 아니, 아니.. 지도를 보니 전쳘역까지 좀 멀어 보이는데, 그리고 지하철은 도중에 갈아타야 해. 밖에 나가서 버스를 알아볼까?
좌린:(역시나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응!!!
아아, 너와 나는 이렇게 다르구나...
매사에 꼼꼼하고 싶은 자유 계획 여행자는 종종 억울하다. 이래도 좋아요, 저래도 좋아요, 라며 무임승차하는 남편과 엄마의 약한 고리를 찾아 기습을 일삼는 두 아이를 데리고 방향을 정하고 길을 찾다 보면 서운하고 분할 때도 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이러쿵저러쿵 따지다가, 이리저리 재보다가 막상 실행에 옮기려면 몸이 나서지 못했던 그녀가 일단 부딪쳐보자, 라고 용기 내어 길을 나서게 된 것은 자유 도보 여행자의 끊임없는 부추김 때문이 아니었던가!
일단 가 보자, 해보면 되지! 라는 자유 도보 여행자의 무대뽀 정신에 그녀 역시 무임승차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