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703_3 copy.jpg » 아빠와 아기. 한겨레 자료 사진."아빠는 의자에서 잠자고, 막 뛰어가는 사람이야."


며칠 전 저녁 아내가 큰 아이에게 “아빠는 뭐하는 사람이야?”라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을 했단다. 아내가 문자메시지로 보내온 이 상황에, 한참 일을 하고 있던 나는 세게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아침엔 아이가 깨기 전에 집을 나선다. 한창 출근을 준비하는데 아이가 눈을 부시시 뜰 때도 있다. 잠깐 가서 눈 맞추고 뽀뽀하고 깔깔대며 장난도 쳐주지만, 금세 부랴부랴 출근길이 바쁘다. 아이는 잠이 덜 깬 얼굴에 실망한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다시 새근새근 잠이 들곤 한다. 잠깐씩 그러는 사이 아이 머릿속에 아빠는 “막 뛰어가는 사람”으로 기록된 모양이었다.


밤에도 아이가 잠든 지 한참 지난 자정께나 귀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주 가끔 이른 저녁에 귀가하면, 아이와 놀면서 소파에 앉았다가, 자세를 고쳐서 적당히 드러누웠다가, 피곤에 지쳐 그대로 잠들기 일쑤다. 그러니 “의자(소파)에서 잠자고”라는 표현이 탄생한 것 같다.


아이의 원망을 생각하며 슬픔에 빠지는 것도 잠시, 문득 너무 억울해졌다. 다른 것보다, 주말은? 주말엔 어떻게든 데리고 놀러다니려는 나의 노력을 그리도 쉽게 잊었나. 생각 같아선 온식구 다 밖에 '쫓아내고' 소파에 드러누워 한손에 리모콘 들고선 뒹굴거리고 싶은데… 그걸 끝끝내 인내하고 입에서 단내 날 것 같은 컨디션을 견디며 온식구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닌 답례가 고작 이런 취급이라니! 참 못난 줄 알면서도, 억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다른 집 아빠들도 흔히 겪는 일이었다. 어떤 이는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집을 나서는데, 아이가 “아빠, 우리집에 또 놀러오세요”라고 인사하는 걸 보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고 했다. 다른 아빠도 저녁 잠자리에 누워서 "아빠, 우리집에 또 언제 와?"라고 묻는 아들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주말마다 접대 골프에 바빴던 아빠는, 아들이 다른 사람에게 “우리 아빠는 골프선수예요”라고 소개하는 걸 보고 아연실색했다.


나란 사람, 적어도 그런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다. 결혼 전 처음 장인어른을 뵙는 자리였다. “자네, 장래에 뭐가 되고 싶은가?”라는 물음에, “저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습니다. 다른 일들은 좋은 아빠의 기준에 맞춰서 결정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장인어른은 그 말이 인상 깊으셨는지, 주위에 만나는 친지들마다 얘기하셨다. 그 덕에 나는 처가에서 ‘가정적인 남자’란 평가를 받았고, 특히 장모님과 처고모님, 처이모님, 처숙모님 등 ‘처가의 여성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았다. 만약 내가 아이로부터 ‘의자 잠, 뜀박질’이란 평가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으신다면, 모두들 그 점수를 죄 회수해가시진 않을까 싶다.


실제 ‘좋은 아빠’는 나의 오랜 꿈이었다. 그 방법엔 정답이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한 선배는 “우리 애들도 어릴 때 똑같이 얘기했는데, 조금 지나면 아빠의 직업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한다”며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 선배가 “느낀다”고는 못하고 “느낀다고 한다”고 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고등학교 때 한 선생님은 “좋은 아빠라는 것도, 결국은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좋은 아빠 아니겠나”라고 하셨다. 그때 선생님은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아빠가 되기 전 기혼남이셨다. 지금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아빠 어디가>라는 TV프로그램을 보는 마음이 난 편치 않다. 나도 아이들과 캠핑 다니면서 돈 벌 수 있는 비현실적인 직업을 갖고 싶어져서다. 아이는 그 프로그램을 보며, 마치 아빠와의 나들이를 상상이라도 하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을 때가 많다. 나는 오늘도 자정이나 돼야 집에 들어가 아이들 이마에 입 맞출 것 같다.


** 이 글은 월간 육아잡지 <맘&앙팡>(디자인하우스) 2013년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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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외현 기자
아이 둘의 아빠인 <한겨레21> 기자. 21세기 인류에게 육아는 남녀 공통의 과제라고 믿는다. 육아휴직 등으로 나름 노력해봤지만 역시 혼자 가능한 일은 아니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하나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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