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 2.jpg

 

첫 아이는 다섯살 때부터 저 혼자 책을 읽었다.

학습지를 통해서 한글을 마악 배운 후 였다.

나는  둘째를 출산한 직후였고, 남편과는 주말 부부로 지내는 상황에서

책 좋아하는 큰 아이에게 맘 놓고 책을 읽어 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서둘러 한글을 가르쳤던 것이다.

어린 동생을 돌보느라 바쁜 엄마를 찾지도 않고 첫 아이는 어린 날의

많은 시간을 저 혼자 책을 들여다보며 지냈다.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 시간동안 저도 성장한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둘째는 딸아이였다.

뭐든 오빠보다 성장이 빨랐다.

배우려는 욕구도 강했고 영리했다.

딸 아이는 한참 전부터 한글을 배우고 싶어했으나 나는 가르쳐주지 못했다.

언니에게 무언가를 진득히 가르쳐 주려면 달려들어 방해를 하는 막내도

있었거니와 이렇게 저렇게 벌여 놓은 일들로 나는 늘 허둥거리며 바빴다.

글을 읽을 수 없어도 둘째 역시 책 보는 것을 좋아했다.

 

 배움에 대한 의욕이나 준비된 면에서는 둘째는 참 빨랐다.

정말 욕심있는 엄마였다면 충분히 엄친딸로 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일로 늘 바빴고 딸 아이의 욕구에 맞는 배움을 적절하게

주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배우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없던 건 아니다.

글을 못 읽는 것 때문에 둘째는 오래 서러움을 당했다.

집에서 DVD를 볼 때마다 자막으로 보려는 오빠와 더빙으로 보자는 동생이

싸우곤 했는데 목소리 큰 오빠에게 밀리는 일이 잦았고, 더빙으로 보기로 해도

글씨도 못 읽는다고 타박하는 오빠 때문에 적지 않게 마음 고생을 했던 것이다.

 

한글을 언제 배우게 하면 좋은가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있다.

일찍 가르치면 더 많이 읽게 되고 더 풍부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학습에 뛰어들어 유리하다는 의견도 있고, 그림을 보며 충분히 상상할

시간도 없이 문자로 이끌어 버리면 오히려 아이의 감성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의견도 있다.

어떤 것이 맞다기 보다 배움에 대한 의욕과 준비된 정도는 아이마다 다르므로

아이에게 맞는 것을 제공해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올해 일곱살이 된 둘째는 부쩍 공부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유치원도 다녀보지 않았기에 내년에 입학할 학교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저 혼자 공책에다 글씨 연습도 하고, 숫자를 써 보는 일도 즐겨 했다.

제가 쓰고 싶은 단어를 내게 써 달라고 부탁해서 그걸 보고 다시 쓰면서

딸 아이는 글씨를 배워 나갔다.

 

처음 배운 단어는 '아이'였다.

그 다음엔 동화책을 들여다보면서 '아이'라는 단어를 발견할때마다

반가와 했다.

'아이'에서, '아기'로, '다시 '아빠'로 단어들은 발전해 갔다.

읽을 줄 알면 바로 그 단어를 공책에 쓸 줄 알았다.

신기하게도 딸은 처음 쓰는 글씨도 반듯 반듯 균형이 잘 맞았다.

초등학교 2년을 다니도록 글씨가 들쭉 날쭉 하고 도무지 균형이

안 맞았던 큰 아이를 겪은 내게는 참 신기하고 대견해 보였는데

알고보니 문자와 언어에 대한 감각은 남자아이에 비해 여자 아이들이

월등히 뛰어 나단다. 둘째를 지켜보면 그 말이 꼭 맞았다.

 

'엄마, '기차' 어떻게 써요? '사자'는 요? 이룸이 이름은요?'

딸 아이는 쉴새없이 내게 물었다. 그때마다 공책에 단어를 써 주고

읽어 주었다. 내가 한 일은 그 정도였다.

그러면 딸은 공책에 몇 번이고 단어를 쓰면서 외웠다.

'엄마, 사랑해요'라고 쓴 그림 편지를 받는 일은 정말 달콤했다.

유치원에 다닌 아이들은 진즉부터 글씨를 배워서 하는 일이지만

저 혼자 익힌 글과 글씨로 일곱살에야 이런 편지를 쓸 수 있게 된

딸 아이의 모습은 내게 충분히 대견하고 기특했다.

 

딸 아이는 더 열심히 그림책들을 들여다 보며 제가 아는 단어들을

띄엄 띄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 - 와, - 과, -는'같은

연결 어미들을 읽히자 글 읽기는 더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없습니다, 좋아요. 했습니다, 없어요'같은 말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글씨를 읽고 싶다는 욕망을 오래 품어 왔었고, 꾸준히 책을 들여다보며

그림을 통해 내용을 이해하고 엄마가 읽어주었던 것을 기억해 내는 과정을

통해서 아마도 글씨의 형태를 암기하는 능력도 자연스레 키워온 것인지도 모른다.

제가 아는 단어를 읽는 수준에서 짧은 문장을 읽는 것으로 발전하는데는 정말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지난밤에는 몇 군데 막히는 부분을 도와준 것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상당히

긴 그림책을 제대로 읽어내서 가족들의 박수를 받았다. 아직은 단순한

문장이 실린 책들을 읽고 있지만 이 정도 속도라면 몇 달안에 제가 원하는

어떤 책들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엄마로서 플레쉬 카드를 만들어 주거나, 따로 글자 공부를 시켜주지도 못 했는데

거의 저 혼자의 힘으로 이만큼 배움을 이끌어 내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배우는 피아노도 시간이 날때마다 연습하고, 종일 무언가를 그리고

오리며 만들어 내고, 제가 아는 단어들을 공책에 쓰는 것을 좋아하는 딸 아이는

큰 아이를 키우며 느꼈던 것 과는 또 다른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한다.

 

딸을 낳으면 '빨간 머리 앤' 시리즈 전 권을 함께 읽고 즐겁게 주인공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날들을 꿈 꾸었는데 그 날들이 조금씩 가까와 지는 걸까?

늘 앞서가는 엄마의 주책은 벌써 이런 상상까지 하고 있다.

 

애썼다, 딸..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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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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