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공공미술관의 새 모델을 만들 수 있을까. 서울시립미술관이 블록버스터 대관전시와 결별하고 시스템 중심, 관객 중심 미술관으로 변신하면서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사진은 지난달까지 이 미술관에서 치러졌던 ‘아프리카 나우’ 전시장.

김홍희 관장의 전시 실험 3년

“환골탈태한 것 같아요.”

지난해부터 미술판에서 서소문 서울시립미술관에 대해 이런 사자성어를 꺼내는 이들이 늘었다. 그동안 블록버스터 대관전의 전당이란 오명을 썼던 서울시립미술관의 탈바꿈이 예사롭지 않다. 국내 독립기획자 1세대로 쌈지스페이스 디렉터와 경기도립미술관장을 지내고 2012년 취임한 김홍희(67) 관장이 변화의 주역이다. 동시대 미술을 대중 친화적으로 보여주는 미술관을 만들겠다는 그 특유의 ‘포스트뮤지엄’ 전략이 빛을 내고 있다. 악폐로 지목됐던 대관 전시를 단호히 끊고 동시대 미술을 조명하는 양질의 기획전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작가들이 직접 음식을 만들어 관객에게 주고 작업에 대해 대화하는 ‘런치 박스’ 같은 관객형 서비스와 산하 분관의 지역별 특화, 해외 네트워크 강화 등도 시동을 걸었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미술관, 자체 기획력으로 승부하는 미술관, 세계성과 지역성이 결합된 글로컬미술관을 구현하겠다던 취임 공약들이 지난 3년간 김 관장과 학예사들의 뚝심과 실천으로 현실화되면서 공공미술관의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시 절반 차지한 대관 끊고
학예사 대폭 늘려 기획전 승부
난상토론 거치며 수준 높여 
‘아프리카 나우’전 등 찬사
‘대중융합형’ 팀버튼전 50만명 봐 
작가들이 대접하는 ‘런치박스’ 등
시민 모두의 공공미술관으로

지난달까지 이 미술관에서 치러졌던 ‘아프리카 나우’ 전시장.
■ 대관전이 사라진 전시장

서울 서소문 미술관 본관에서는 2013년 고갱 전시를 끝으로 외부기획사의 블록버스터 대관 전시가 끊기고 거의 모든 전시가 자체 기획전으로 채워진다. 기획전 절반 가까이를 ‘샤갈’, ‘고흐’ 등 거장 블록버스터 전시로 채워 학예직인 큐레이터들을 관리직으로 동원했던 구태가 싹 사라진 것이다.

자리를 채운 기획전시들은 양질의 수작이 많다. 2~3년 사이 내놓은 ‘북유럽 건축과 디자인’전, ‘유니버설 스튜디오’전, ‘아프리카 나우’전 등은 한결같이 동시대 비주류 현대미술 맥락에서 주제와 작품들을 찾아내 참신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지난달 중순 끝난 ‘아프리카 나우’전은 민속공예품 일색이었던 기존 아프리카 미술전과 달리 현대미술의 최전선에서 활동중인 크리스 오필리, 잉카 쇼니바레 등 아프리카 작가들의 작품들을 대거 소개해 반향을 일으켰다. 2013~14년 열린 ‘북유럽 건축과 디자인’전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디자인 철학과 건축문화를 처음 집대성한 대형 전시였다. 국내 미술기획전으로는 첨단이 아닌 낮은 수준의 기술을 활용해 상상력을 표출한 소장작가들을 다룬 ‘로우테크놀로지’전이나 국내에서 활동중인 외국 작가들의 현대미술 흐름을 다룬 ‘유니버설 스튜디오’전 등이 회자됐다. 뉴욕현대미술관(모마)과 손잡고 2012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치른 영화 거장 ‘팀버튼’전은 영화와 미술이 어우러진 융합형 대중전시를 표방하면서 50만명 가까운 관객을 불러모았다.

산하 분관들은 지역 특화형 전시장으로 차별화했다. 2013년 9월 개관한 북서울미술관은 아파트 주거타운 부근에 있다는 입지를 고려해 ‘12간지’전 등의 어린이 전시와 독일의 판화거장 ‘케테 콜비츠’의 반전 판화전 등을 잇따라 열며 관객을 모았다. 관악구 남서울 분관은 소규모 소장품전 위주로 운영되던 관행을 벗어나 생활디자인 전문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현재 열리고 있는 ‘2014 신소장작품전 세마 살롱’전의 전시 모습.
최근 시립미술관 전시들은 동시대 미술이라는 일관된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동선이나 작품배치, 관객서비스 등에서도 국립현대미술관 등 다른 공공미술관과 차별화되는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본관에서 열리고 있는 2014 신소장품전만 해도 여느 공공미술관처럼 구입 작품들을 백화점식으로 나열하는 방식을 피했다. 이례적으로 구멍 뚫린 가벽을 쳐서 조각, 그림들을 다각도로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설치작품들을 통로에 과감하게 배치하고 직접 조형물 의자에 앉아보거나 만져볼 수 있도록 배려해 편안한 미술골목 기행 같은 인상을 준다. 19세기 프랑스의 ‘살롱’ 전시의 형식을 지금 현대인 감성에 맞게 다듬어 풀었다고 한다. 26일 전시장에서 만난 프리랜서 작가 박만진(40)씨는 “민간 전시장에서 찾기 힘든 비상업적인 현대미술품들의 다기한 흐름들을 가깝게 접할 수 있었다. 관객 시선과 동선에 무심한 국내 공공미술관의 낡은 틀을 벗어나 공공적 컬렉션의 본령에 충실하려는 의지가 신선하다”고 평했다.

■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미술관

김 관장은 이런 변화의 배경에 자신이 경기도박물관장 시절부터 생각했던 포스트뮤지엄 전략이 자리잡고 있다고 했다. 특정 문화인들만 찾았던 엘리트 공간에서 시민, 타자를 먼저 생각하는 미술관으로, 대안적 미술을 알려주고 교감하려는 시스템 중심 미술관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최근 들어 전시에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김 관장은 “학예사 수를 종래 4~5명에서 28명으로 대폭 늘리면서,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 비서구권 현대미술에 집중하고, 국내 원로·중견·신진 작가를 해마다 번갈아 소개한다는 식으로 구체적인 매뉴얼을 짜서 실행을 독려한 것이 효과를 나타낸 것”이라고 설명한다. 매년 거시적인 기획 목표를 세우고 학예사마다 배당된 전시 매뉴얼을 배분하면서 세부적인 기획 내용은 전체 회의에서 난상토론으로 결정하는 방식이 정착됐다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3층에 프로젝트 갤러리를 신설해 사운드아트, 건축 등 학예사들이 희망하는 전시 구상도 실현할 수 있도록 했다. 장기 계획이 없고, 관장이나 공무원, 일부 재단 인사에 의해 전시가 재단되기 일쑤인 국내 다른 미술관의 관행과는 차별화되는 구도다. 연간 10건 이상 본관과 산하 분관에서 많은 전시가 열리지만, 학예사들이 전체 기획전시를 책임지고 만들어나가는 구도가 정착되면서 안정적인 기획 운영 구조가 자리를 잡았다. 동시대 대안적 미술을 조명한다는 방향성이 전시와 운영 프로그램에서 지속적으로 투영되고, 미술관의 색깔도 뚜렷해졌다. 난지 레지던시의 작가 입주 작업공간에도 외국 작가들을 공모하는 등 국제네트워크 활동도 강화되고 있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
■ 동시대성과 대중성,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까

영국의 테이트 모던이나 미국 뉴욕의 모마 등 세계적인 유명 미술관들은 수백만명에 달하는 관객 동원력을 앞세워 첨단 전시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과 김홍희 관장의 가장 큰 고민은 이 부분에서 시작된다.

미술관은 2년 만에 기획 시스템이 뿌리를 내리면서 동시대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부각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대중성을 가늠하는 지표인 관객 확보 면에서 메워야 할 간극이 존재한다. 지난해 미술관 관객수는 71만4972명으로 2013년의 157만여명에 견줘 절반 이상 줄었다. 대관 전시를 접은 것이 근본 배경이라, 대중이 미술관 기획 전시를 외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 학예사는 “과거엔 블록버스터 전시 외엔 거의 관객이 없었다. 따라서 미술관의 자체 전시를 찾은 관객은 오히려 늘었다고 봐야한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김 관장은 포스트뮤지엄 전략의 또다른 모토로 대중, 타자와 친한 미술관을 강조해왔다. “시스템과 기획력은 대중의 눈에 금방 드러나지 않지만, 대중문화 코드와의 적절한 만남은 당장 미술관 인지도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말이었다. 작가들을 요리사 삼아 직장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작품세계를 설명하는 ‘런치박스’ 행사나 자원봉사 대학생들이 전철역 등에서 미술관 이미지를 알리는 ‘마케터’ 프로그램을 벌인 것이 그렇다. 올 연말엔 영국의 거장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 특별전을 열 예정이라고도 했다.

관객 저변 확대를 위한 그의 해법 찾기는 여전히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다. 지난해 거대 방송자본의 계열사인 한 케이블채널의 작가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아트스타코리아’에서 최종 선정 작가 3명의 작품을 아무 조건 없이 전시해주고 최종 결승전 방송무대까지 내줘 자본의 ‘들러리’ 논란을 사기도 했다. 유진상 평론가는 “관객 확충 전략은 또다른 의미의 기획력인데, 현대미술 흐름과 달리 명쾌하게 해법을 잡기가 쉽지 않다”며 “기획 전시 시스템을 처음 공공미술관에 정착시킨 점은 평가해야겠지만, 앞으로 어떤 방식의 대중 전시 모델을 찾아낼지도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산하 분관과 난지 레지던시뿐 아니라, 지난해부터 비엔날레인 미디어시티서울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올해는 서울사진축제도 맡으며 가을엔 젊은 작가들이 참여하는 미술품 장터(아트페어)도 차릴 참이다. 연간 100억원대 예산과 28명의 학예인력으로는 감당하기 버거운 규모다. 울림 깊은 전시는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있어야 나온다. ‘한계는 많지만, 할 일은 여전히 많다’는 김 관장이 남은 임기 1년 동안 대안적 미술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너끈히 잡을 수 있을까.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위 내용은 2015년 3월 2일자 한겨레신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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