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회, 괜히 했어

조회수 4933 추천수 0 2012.12.10 11:04:12

[한겨레 토요판 12.8일자] 엄마의 콤플렉스

미국에서의 파티는 심심하다. 드라마에서처럼 등 파인 드레스에 치렁치렁한 귀걸이를 걸치고 샴페인 잔을 든 채 우아하게 건들거리는 파티는 없다. 그런 파티에 가는 사람도 어딘가 있긴 하겠지만 미국 생활 10년 동안 적어도 내 주변에선 보지 못했다. 일단 그렇게 벗고 설치기엔 집들이 너무 춥다. 미국 집들은 대개 단열이 시원치 않고 우리처럼 뜨끈뜨끈하게 불을 때고 살지도 않아서 공연히 얄팍하게 입고 갔다가는 감기 걸려 오기 십상이다. 작은 규모의 가족 초대가 아니면 대개 서서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것도 내겐 고역이다. 한 손엔 음식 접시를 한 손엔 와인 잔이나 맥주병을 든 채 그들은 어떻게 그리 오래 서 있을 수 있는지 신기할 뿐이다. 이런 자세는 양껏 먹을 수도 양껏 마실 수도 없게 만든다. 한 상에 둘러앉아 질펀하게 먹고 마셔야 잔치 분위기가 난다고 믿는 나 같은 사람에겐 일종의 벌서기나 다름없다.

미국 파티를 더 재미없고 따분하게 만드는 건 대화의 주제다. 언쟁의 소지가 있는 시사적 쟁점이나 정치 얘기는 아예 꺼내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우리에겐 친근함의 표현이랄 수 있는 자기 식구 흉보기도 자제해야 한다. 언젠가 결혼한 여자 동료들끼리 모였을 때 “우리 남편은 무뚝뚝하고 재미가 없어서…”라고 푸념을 했는데 동료들의 반응은 “거 참, 안됐구나”(I’m so sorry)였다. 허걱! 내가 그렇게 말하면 응당 “뭐 그런 걸 갖고 그러세요. 우리 남편은 더해요…” 할 줄 알았던 나만 바보 됐다. 자기 신랑 흉보기가 여자들끼리 친해지는 방법의 하나라고 믿었던 내 사고가 지극히 한국적이었던 게다. 차 떼고 포 떼고 얘기를 하려니 대화 주제는 가볍게 겉도는 것들뿐이다. 아이는 잘 크냐? 휴일엔 뭐 하냐? 여행지는 어디가 좋고 다이어트엔 뭐가 좋고…. 정말 하품 난다.

질펀하고 끈적끈적한 한국의 송년회가 그리웠다. 적어도 내 기억 속의 송년회는, 취기를 핑계 삼아 그동안 서로 못 했던 얘기도 토해내고 언쟁을 벌이다가 다짐도 하고 어깨동무도 하는 그런 자리였으니까. 한국에 와서 오랜만에 옛 친구들과 회포를 풀자고 만나면서, 내가 물정을 너무 몰랐구나 싶었다. 새삼 선도적 담론인 양 여성대통령론을 들먹이면서 음식점 여종업원한테는 반말로 막 대하는 친구, 자식의 고액과외와 위장전입을 자랑삼아 말하는 친구도 있고, 불미스러운 일로 공직을 떠난 동창을 감싸면서 그게 관행인데 혼자만 억울하게 됐다고 변명해주는 친구도 있다. 놀라운 건, 그런 모습을 대하면서도 대놓고 질타하는 사람이 드물어졌다는 점이다. “네가 어떻게 그러냐?” 하면서 언성을 높이는 건 20여년 전에나 부리던 치기였던가. 우리가 늙은 거다. 부당한 것에 침묵하기. 불만은 있으되 나서지 않기. 그래 놓고 돌아서서 “세상이 썩었어” 하며 혼자 자탄하기.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할지,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붙들고 조곤조곤 따져봐야 할지 심각히 고민중이다. 이건 내가 그토록 바라던, 사람 냄새 나는 끈끈한 송년회가 아닌데….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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