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에 이야기와 가락 곁들였더니…

[esc] 박미향 기자의 ‘나랑 밥 먹을래요?’

 

» 돈가스

“‘장기하와 아이들’이 저희 지면을 빛내주시면 너무 감사할 것 같아요.” 순간, 전화기 너머는 암전. 고작 1, 2초인데 마치 수백년 세월에 눌린 화석처럼 시간이 늘어지는 듯했다. 곧이어 장기하의 담백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아니고 얼굴들인데요.” 침묵의 원인은 ‘아이들’이었다. 어쩌자고 서태지의 ‘아이들’을 장기하의 ‘얼굴들’과 바꾼 것일까! 불치병이다. 고유명사, 대명사만 만나면 고불고불한 뇌는 제 마음대로 마구 바꿔가며 요상한 데로 뻗어간다. 그때부터다. 악수를 하기도 전에 만나는 이의 이름 석자 앞에서 긴장부터 한다. 외우기 바쁘다. ○○○씨, ○○○씨, ○○○씨….

그만은 예외였다. 이름을 듣자마자 머릿속에는 수북하게 쌓인 국어참고서와 훈민정음, 세종대왕, 집현전 등이 풍선을 만들어 자리잡았다. 오한샘! 지금이야 흔한 이름이지만 23년 전에는 달랐다. “‘한샘’이란 이름으로 등록한 첫번째 사람이 저입니다.” 이름을 지은 그의 아버지는 국어교사였다. 그는 말도 참 잘한다. 술술 나오는 이야기는 그리스·로마 신화처럼 흥미진진하고 간간이 추임새로 들어가는 농담은 개그 지망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맛깔스럽다. 바다의 파도가 높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가 해안으로 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 그의 말은 나름의 리듬감을 가지고 오르락내리락한다.

그와 서울 방배동에 있는 한 돈가스 전문점에서 만났다. <캠핑요리>, <사케 한 잔, 안주 한 접시> 등을 펴낸 김정은 배화여자대학 전통조리과 교수가 메뉴를 개발한 이곳의 맛을 함께 알아보고 싶었다. 그는 현재 <교육방송>(EBS)에서 음식프로그램 <천년의 밥상>을 만드는 피디다. 고임떡, 오정주 이야기, 퇴계 이황의 밥상 등 아름다운 우리 음식을 매끈하고 품위 있는 느린 음악과 단아한 영상으로 소개하고 있다. 3분 안팎의 짧은 시간이지만 보다 보면 마술에 걸린 것처럼 빨려들어간다.

그 느린 여행은 온갖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우리 시대에 옛 밥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준다. 그는 우리 옛 음식을 벽화에서, 고문서와 옛 문헌에서 찾아낸다. “한 식당에서 평범해 보이는 김치가 ‘누가 먹었던 것’이라고 주인장이 말하자 너도나도 달라는 것”을 보고 같은 음식이라도 이야기가 있으면 달라지는구나, 생각했다. 이야기가 있는 음식은 한 장의 명화로 다시 태어났다. “음식 자체를 클래식 음악처럼 감상하는” 프로그램이 탄생한 것이다. <천년의 밥상>도 후대의 소중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 박미향 기자의 ‘나랑 밥 먹을래요?’
밥상 이야기를 좋아하는 피디와 돈가스라! 돈가스는 1895년 일본 메이지시대에 만들어진 음식이다. 19세기 서양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서양의 육식문화도 함께 일본에 들어왔다. 일본인들은 서양식 고기요리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개발해 돈가스를 만들었다. 고개를 끄덕끄덕할 만한 이야기가 이 음식에도 있다. 돈가스 전문점 ‘왕돈까스가게 고슴도치’는 1980~90년대 우리 경양식 분위기를 식탁에 끌어와서 이야기를 만들었다. 내 얼굴의 3배 정도 되는 커다란 돈가스는 광활한 돼지고기 벌판이다. 마른 빵가루 대신 보풀보풀 생빵가루를 뿌려 튀겨낸 맛은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노란 수프, 단무지, 양배추 샐러드는 친근하다. 잘근잘근 돈가스를 자르는 동안 오 피디의 음식 이야기는 계속되었다.(‘왕돈까스가게 고슴도치’ 02-535-1066)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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