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꺼 한 자루, 두 아이 꺼 각각 한 자루씩 세 자루의 연필을 깎는 동안 내 엄마의 뭉툭한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떠올랐습니다.
몇 주 전, 부모님과 다녀온 제주도 여행사진을 들춰보다 문득 사진 속 엄마의 오른손이 온통 왼손으로 덮여 있거나 가려져 있다는 걸 알았어요. 20대 초반, 사고로 잘려나간 엄지손가락이 나에게나 별 거 아닌 일이었지 엄마에겐 늘 감추고 싶고 아픈 기억이었던 것이지요. 언젠가 베이비트리에 엄마의 손가락에 대해 글을 쓴 적도 있었는데, 그걸 이제야 눈치챘다니...
어린 시절, 엄마는 무엇이든 뚝딱 만들었습니다.
종이 박스에 꽃무늬 벽지를 발라 근사한 책꽂이를 만들었고, 문에 창호지를 바를 땐 미리 따둔 꽃잎을 넣어 햇살이 비칠 때마다 은은한 꽃 그림자가 지게 했어요. 여름날 식재료라고는 밭에서 나는 채소, 지난 겨울에 담근 김치뿐이었지만 하루는 호박전, 하루는 깻잎전, 하루는 신김치와 고추가 들어간 칼칼한 수제비. 엄마 손을 거치면 소박한 밥상은 금방 윤기가 돌았어요.
특히 엄마 손이 마법 같다는 생각을 했던 건 바로 연필을 깎을 때였습니다.
왼손 엄지로 칼날을 쓱쓱 밀고 당길 때마다 끝이 살짝 휘어진 나무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졌고 저는 그걸 주워 부러뜨리며 놀았어요. 매끄럽고 날카롭게 잘 깎인 연필들을 필통에 가지런히 넣을 때의 희열이란! 글씨 쓰는 것,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건 엄마의 연필깎기 마법을 구경하는 재미에서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 굉장히 마음에 드는 새하얀 연필깎기를 샀습니다. 글자와 그림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여섯 살 큰 딸에게 줄 선물이었는데 당분간 꺼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에게는 연필 깍는 즐거움을, 아이에겐 엄마가 깎아준 연필로 사각사각 글자를 새기는 즐거움을 선물하고 싶어서요. 그런데 엄마, 그때 엄마도 지금 나처럼 즐거웠나요?
* 마지막 질문에 대한 엄마의 답변 :)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의 행복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