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이라도 두 발을 담그고 싶은 곳이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 마을의 여름, 집 가까이 언제든 뛰어들 수 있는 작은 내도 흐르고 있다. 그 보다 여름방학을 맞은 나와 친구들을 더 설레게 만들어주었던 장소가 있었다. 온전히 하루를 놀기 위해 삼사십 분 정도는 가볍게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계곡이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뜨거운 여름날 아침에 짐을 챙겨 우리가 향했던 곳은 ‘절골’이었다.
절골 계속은 주왕산 산자락에 이어진 계곡 중 하나이다. 1년에 가족과 함께 또는 학교에서 소풍으로 한 번 이상은 늘 가는 곳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으면서 시원한 그늘은 물론 물놀이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우리는 둥그렇게 물이 모였다 내려가는 옆쪽으로 자갈로 된 평편한 곳에 짐을 풀었다. 여럿이 앉을 수 있게 돗자리도 깔았다. 점심밥을 짓기 위해 냄비를 걸 돌들을 모아오고 불쏘시개로 사용할 마른 잔가지를 주었다. 지금은 취사금지가 되었지만 그 때만 해도 가능했다. 잔가지가 타면서 내는 연기에 눈은 매웠지만 호호 불어가며 불을 지폈다. 정성껏 지핀 불로 만든 밥이 전형적인 삼층밥이 되었다. 위는 생쌀로 오도독 씹혔고 저 아래쪽은 까맣게 타기 직전이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밥을 다시 위아래로 저어 물을 더 붓고 좀 더 익혀서 한 끼를 해결했다.
계곡에서 보내는 하루의 최고는 역시 물속으로 뛰어드는 재미였다. 물놀이하는 곳 둘레가 바위로 되어 있고 길게 뛰어올 수 있는 정도는 아니나 몇 발자국 정도 뛰는 시늉을 할 수는 있었다. 종종종 달려서 ‘첨벙’하고 물속으로 뛰어들 때의 기분이란 8월 한 여름의 무더위를 모두 날리고도 남았다. 물깊이도 가장 깊은 곳이 서서 가슴까지 정도여서 물장난 치며 놀기에도 좋았다. 친구들을 향해 손바닥으로 물을 세게 치면서 날리기도 하고 얼굴 쪽으로 한 바탕 물세례를 맞으면서 신나게 놀았다. 무엇보다 외지로 많이 알려지지 않아 우리가 놀러갔던 날 절골은 완전히 우리 차지였다. 몇 번씩 물속으로 뛰어들다가 자갈 위에 앉아 젖은 몸을 말리다보니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바위와 나무들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갑자기 줄어들 때쯤 짐을 챙겼다.
올라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갔다. 계곡을 벗어나 들길로 이어지는 곳으로 나오니 가는 방향으로 서산에 해가 아직 훤했다. 부모님들은 아직 밭에 계실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뛰어다니며 놀다보니 아침에 긴장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남녀 아이들 10여명이 밭들 사이로 난 좁은 시골 길을 떼 지어 걸으니 길이 가득 찼다. 여름방학이 끝날 때까지 해 가야할 숙제와 계속될 무더위도 남았지만 실컷 하루를 놀고 나니 그 모든 게 금방 지나갈 것 같았다.
스물다섯 살 되던 해 대학동기와 시골에 함께 내려갔을 때 다시 절골 계곡을 찾았다. 여름이었지만 어릴 때 마냥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지는 못했다.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 신발과 함께 내려놓고 흐르는 물에 두 발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계곡의 시원함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친구랑 물속에 담긴 발을 기념사진으로 한 컷 찍었다. 절골 계곡은 생각만 해도 여름날의 무더위를 날려줄 만큼 시원한 재미를 준 곳이다. 올해는 아이들과 함께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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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게 글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있기에 속상해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아이가 어릴 때는 몸이 더 많이 힘들었던 것 같은데 아아가 커가면서 말로, 서로의 생각의 차이로 부딪힐 일이 많아졌다. 이 와중에 글은 나를 살리는 작업이다. 글을 쓰면서 나를 되돌아보고 스스로 위로를 받고 있다. 내게 잊을 수 없는 장소가 어디일지 생각하던 중에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시골집 근처 계곡이었다. 어릴 때 친구들과의 재밌는 추억을 다시 떠올리며 그 때 내 나이가 된 큰 아이를 보게 된다. 엄마로서 가져가야할 것과 아이를 대하면서 내려놓아야할 것 사이의 균형을 잘 맞춰나가고 싶다. 일요일 오후 아이들과 가까운 공원에라도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