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 사진 자료 <김종수 기자>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 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를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좀 전에 칭얼대는 아이를 들쳐 업고 저녁 나들이 다녀왔다. 큰 길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드니 풀벌레 소리가 가득하다. 익숙한 귀뚜라미 소리 말고 다른 소리들이 들린다. 전에는 듣지 못했던 소리들이다. 작은 풀벌레들의 소리를 자장가 삼아 아이는 어느새 잠들었다.
아이의 작은 귀는 나보다 먼저 이 작은 소리들을 들었나보다. 작아서 더 작은 것들을 잘 보고 잘 듣는 아이다. 길 한 가운데 한참을 앉아 바닥을 매만지며 내가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주워 들고 좋아하기도 하고, 내 눈엔 안 보이던 고양이를 찾아 손짓하기도 한다.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잘 놀라고, 나무 블럭 두 개가 내는 소리에도 환히 웃는 아이다.
아이의 작은 귀를 매만지며, 감은 두 눈을 살짝 쓸어내리며, 그보다 더 작을 풀벌레들의 작은 귀와 눈을 생각한다. 새삼 이 작디 작은 것들이 고마운 가을 저녁이다.
이래서, 가을이 참~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