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a9936015(날개)
http://blog.naver.com/solchani00/220078068801
아, 틀렸다.
돌쟁이 쌍둥이들을 재우려고 누워서 책 리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은 오늘 다 읽었다. 책 제목이 뭐였지. 희망의 불꽃? 아니야. 희망의 불씨? 아니야. 그래, 희망의 불빛이었지. 맞아. 불꽃은 너무 강렬해. 그렇게 강렬한 불꽃을 이야기한다기보단 그냥 담담한 불빛 정도지.
애들이 잠들고 나와서 책을 보니 <희망의 불꽃>이다. 영어 제목을 보면 좀 납득이 간다. 재 속의 불꽃이라…그런데 한국 제목 희망의 불꽃은 좀 상투적이다. 제목은 기억에 잘 안 남을 것 같다.
그러나 내용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 조너선 코졸이라는 작가도.
1. 작가는 인물들을 묘사할 때 애정이 가득하다. 작가가 묘사하는 사람은 눈에 생생하게 그려지는데 대체로 긍정적이고 의지가 강하다. 우리가 흔히 르포에서 사람을 소개할 때 먼저 소개할만한 인종, 나이, 그리고 이 사람의 현재 처지를 극명하게 드러낼 에이즈 환자라거나 하는 내용은 뒤에 있다.
앨리스 워싱턴의 삶이라는 글에서 특히 중간 이후에 그 사람이 흑인이고 에이즈환자라는 것을 밝히는데 글을 읽고 있는 나 스스로에게 놀랐다.
브롱크스 지역에 사는 빈민들 대부분이 흑인일텐데 앞부분 앨리스 워싱턴 묘사에서 나도 모르게 밝고 자기 주장이 확실한 백인 여자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에이즈 환자라는 말에 이 여자 이미지를 어떻게 그려야 할지 갈팡질팡.
감사의 말을 보면 작가는 이 책을 쓰고, 이 책에 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원고를 보내 확인을 받았다. 책 속에 긍정적으로 그려졌든 부정적으로 그려졌든 웬만한 사이가 아닌 사람이 묘사한 글 속 자신(혹은 자기 자식이나 부모)의 모습은 다르다고 느끼기 마련인데, 이 작가 글 속 주인공들은 그렇지 않았나보다. 25년을 그냥 연구 목적으로 들리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정말 생활 속 고민, 문제를 나누던 사이였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책을 보다보면 어떻게 작가는 이 많은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면서 강의하고, 글을 쓰고, 자기 생활을 했을까 싶기도 하다.머릿속에 미국 지도가 전혀 그려지지 않아 보스턴과 뉴욕 사이의 거리를 한번 찾아보기도 했다. 버스로 4시간쯤 걸린다고 한다. 아무리 미국 땅이 넓다지만 그래도 꽤 먼 거리다. 그런데 상시로 들려 방과후 교사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보스턴으로 돌아가고…
좋은 글은 그만큼의 시간을 들여야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든다.
2. 이 조너선 코졸이라는 작가가 쓴 책을 쭉 한번 읽어야겠다. <젊은 교사에게 보내는 편지>, <교사로 산다는 것> 먼저.
3. 책의 1부를 읽을 때는 같은 환경 속에서, 같은 부모 아래서 자랐지만 대체로 남자 아이들이 환경에 짓눌려 무너지는 경우가 많이 나온다. 아들딸을 가진 부모가 되니 이거원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딸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아들을 밝고 성실하게 키우기가 훨씬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책 끝까지도 지옥같은 브롱크스 거리의 삶을 경험하고 나쁜 길로 빠진 애들은 대체로 남자애들이다. 물론 잘 극복하고 훌륭하게 자기 몫을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아이들 가운데에도 남자애들은 있다.
남자여자의 문제가 아닌데, 그냥 아들 둔 부모 마음으로 그렇게 좀 보였다.
공통점은 환경을 잘 극복해낸 아이들 경우 부모, 특히 엄마가 열악한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으려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지낸 것이 마음에 큰 상처가 되었느냐고 묻더군요. 전 아니라고 대답해요.
<마음에 큰 상처>라니, 그건 너무 점잖고 근사한 표현이에요. 그건 끔찍한 악몽이었어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고요.”
사실 열악한 상황,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곳이 어떤 곳인지 나는 모른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사람을 짓밟고 황폐화시키는 곳일 것이다. 그런 곳에서 우울증이나 에이즈, 마약 중독 같은 병을 이겨내며 아이들을 키우고, 중심을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역시 상상할 수 없지만 정말 대단한 일이다. 물론 그것은 엄마나 부모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들, 사회가 있었기에 가능하다.
믿고 의논할 상대가 되어준 신부님, 작가, 이웃들 거기에 대안을 제시하고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 자신들 역시 상황을 바꾸기 위해 쟁점화시키고 사회에 적극적으로 요구하려고 한다.
4. 읽다보면 혹시 이런 혜택은 성당을 중심으로 종교공동체에 속해야 얻을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이런 빈민가나 어려운 국가에서 종교가 하는 역할은 훌륭하긴 하지만, 또 그 집단만의 폐쇄성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제대로된 종교는 그렇게 강요하지 않는다.
“두 아이 모두 신을 믿는다고 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신앙을 설명했다. 라라는 천주교 신자이긴 하지만 <어느 교회 한 곳>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진 않고 대학 때 사귄 친구들과 어울려 <여러 교회>에 가봤다고 했다. 아직까지 <제 신념에 맞는, 소속감이 느껴지는> 교회를 찾이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파인애플은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그 애는 기도를 하긴 하지만 신을 <예수 같은 인격, 다시 말해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보기보다는 <권능><선><나를 보호하고 돌보는 힘>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애는 <저는 늘 그분이라는 표현을 써요. 마치 아버지나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처럼 말이죠>라고 말했다. ”
222p
종교공동체의 도움으로 좋은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파인애플 자매에게 신이나 종교는 자신의 머리로 고민해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신선했다.
5. 미국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엉망인 곳도 있고, 제대로 교육을 하고 있는 곳도 있고, 시험 점수만 높게 따려고 하는 곳도 있다. 그러나 대학은 대체로 다들 제대로인가 보다. 아이들이 대학에서 배우는 한 과목 한 과목이 의미가 있고, 이 대학을 졸업하고나면 브롱크스의 삶에서 더 나은 삶을 살 거라는 보장이 확실해보인다. (물론 작가는 단순히 대학에 들어간 걸 성공이라고 본 건 전혀 아니지만)
우리나라는 너도나도 대학에 가고, 엄청난 등록금을 바치지만 그곳에서 듣는 한 과목 한 과목은 학문적 깊이에 전혀 의미가 없고, 대부분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서 어떤 것도 보장되지 않는다. 등록금만큼 빚이 쌓여있기만 하다.
또 괜찮은 학교는 교장을 비롯한 선생님들이 그 아이의 입학을 허락할 때 그 아이의 현재 성적, 형편 그리고 미래까지 넓게 보고 도움을 주려한다.
나는 교사 역할이 이렇게 크다는 걸 이 책을 보고서야 알았다.
생각해보니 아이들이 장래를 그릴 때 가장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은 선생님이지만, 전혀 그런 경험을 못했다.
6. 이 책은 문제제기부터 해결 방법까지 명확하다.
내 아이만 찜통에 몰아넣는 교육 속에서 구해내려고 유학 보낼 일이 아니라 공교육을 제대로 바꿔야 한다는 것. 빈민가 아이들 중 똘똘해 보이는 애를 골라 돈을 대주는 것이 아니라 빈민가든 어디에 있는 학교든 다 제대로 된 학교를 만들어서 교육이 삶을 바꿀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이런 자선은 그 규모가 아무리 크다 해도 제도적인 형평성과 공정성을 보장하는 공교육의 성과를 대체할 수 없다. 파인애플과 제러미가 이룬 학업적인 성취를 보며 예외적인 기회가 허용된다는 것을 자축할 것이 아니라, 빈곤이 만연한 지역의 공립학교에 넉넉한 자원과 소규모 학급 구성,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충분한 보수를 받는 교사들을 보장하여 모든 아이들이 배움을 만끼할 기회를 누리도록 해야한다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현재로서는 빈민 아동들은 신중한 선택 과정을 거쳐 선발되거나 우연히 온정이 넘치는 사람들의 눈에 뜨일 경우에만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자선과 우연, 협소한 선발의 기회는 민주적인 사회의 아동 교육 시스템이라고 할 수 없다." -p348
맞다. 진짜진짜 못 사는 애들만 골라서 밥을 주고, 교과서를 줄 게 아니라 누구나 교육 시스템 안에 들어오면 교육에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고, 교육이 부의 재분배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정말 시민이 주인인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하는게 진짜 자유민주주의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진짜진짜 가난한 애들한테 베풀듯 몇 가지 툭 던져주는 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