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야 산다'. 아프면 서럽고 힘든데 그래야 산다고? 이 책은 한동안 푹 빠져서 읽었던 고미숙 선생님 책에 자주 언급되었던 책이다. 고미숙 선생님 책을 읽으면서 다음에 읽어봐야지 하고 벼르고 별렀던 책. 드디어 손에 넣고는 생각보다 앞부분에서 진도가 안나갔다. 서두에 나온 철분과 관련된 유전병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게 느껴졌다. 2월에 새로 일을 시작하고 아이 병원 가는 일까지 끝내고나서야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다시 펼쳐보았다. 책 중반에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로 급선회하면서 이틀 밤 시간에 후다닥하고 다 읽어버렸다.
교양과학서이지만 육아서이기도 했다. 임신 기간을 포함하여 전후 엄마의 건강과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불어 아빠의 영향도. 태어난 후 부모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생물학적인 연구로 보여주니 마음에 다가오는 정도가 엄청났다. 이 부분이 요즘 더 육아에 관심이 많아진 내 호기심을 자극한 듯하다.
아마 많이들 기억하고 있으리라 보는데 '라마르크'라고, '용불용설'이라는 진화설을 주장한 것으로 생물 교과서 진화부분에서 다윈 전에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그런데 오, 이런! 라마르크는 프랑스 출신의 사상가이자 박물학자란다. 과학자라기보다는 철학자에 가깝다고 한다. '획득형질 유전'이라는 개념을 주창한 것은 사실이지만 제안한 건 아니며 본인이 제안자인 양 행세하지도 않았지만 우리 생물 교과서에서만 하더라도 그는 과학자 이미지로 굳어져 있다.('아파야산다'-샤론모알렘 p.172) 라마르크가 이 책에 나온 건 그가 주장한 것처럼 되버린 획득형질 유전론이 100퍼센트 맞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란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해하지 말자고 하면서도 책 속에 등장하는 기존 오류들을 접할 때면 한참 멍해지는 기분이 든다.
이 책에는 많은 생물학 용어들이 등장한다. '쓰레기 DNA'가 '비암호화 DNA'로 바뀐 이야기등 DNA와 RNA는 기본이고 레트로바이러스, 메틸화, 텔로미어 등. 전공 분야 용어라 그리 어렵지 않게 읽었지만 이런 용어들이 이제 일반일들에게 생소하지 않게 정규과정에 포함되어야겠구나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내 전공분야가 이렇게 흥미진지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인간 게놈프로젝트는 많이 들어보았을텐데 이 지도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란다. '인간 에피게놈 프로젝트(Human Epigenome Project)'라고 하는 본격적인 연구가 유럽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제야 이 용어를 접하다니 생물학 최신 정보에 이렇게 깜깜이었구나 싶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같은 어른들이 학교 때 배운 교과서 지식이 다인 양 아이들을 가르치는게 아닐까라고 오지랖넓게 걱정도 되었다.
생명유지를 위한 구식화, 즉 노화도 이와 비슷하게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한다. 첫째, 구식 모델을 처분하여 신형 모델이 등장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이는 곧 변화, 나아가 어느 정도 진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뜻한다. 둘째, 노화는 기생균 투성이가 된 개체를 제거하여 후대가 감염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집단을 보호할 수 있다. ('아파야산다'-샤론 모알렘,p.238)
우주는 무질서를 향해 나아간다. 무질서로 이끄는 그 모든 힘을 생각하면 우리가 산다는 것 자체가, 나아가 우리 대부분이 이렇게 무사히 오래 산다는 것이 불가사의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건강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경외심을 품고 감사해야 한다. ('아파야산다'-샤론모알렘, p.256)
결론으로 갈수록 저자가 왜 이 책을 썼는지 명확해지면서 책 내용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나이를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이 나이에 이런 호기심이 생겨도 될까 싶을 정도로 내 머릿 속을 휘저어준 이 책에 감사한다. 건강하고 안정적인 삶이 아닌, 아프고 고생스러운 일상 속에 건강과 안정이라는 행복이 가끔 있는 것이 평범한 것이 아닐까.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면 건강한 삶에 더 감사하며 고통 받는 일들에 좀 더 의연해질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