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토요판/가족] 나는 신세대 시누이

▶ 시, 시, 시 자로 시작하는 말은? 다 싫다고 했습니다. 시, 시, 시 자가 호칭 앞에 붙는 사람들이 아무리 잘해줘도 싫다고 언니는 말했습니다. 여기 시월드에 살고 있지만 ‘시’스럽지 않은 사람도 있긴 합니다. 남녀 차별 없이 자라서 자아실현과 자기계발에 바쁜 신세대 시누이들은 조선 후기 시누이와 다르지 않을까요. 무심함 속에 평화가 피어난다는 한 시누이의 전언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나는 몰랐습니다. 심지어 나를 세상에 내놓을 부모도 모르는 법이지요. 엄마 배 밖으로 나올 때부터 나는 시누이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오빠가 하나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 애지중지 키운 (적어도 엄마 눈에) 잘생기고 똑똑하고 믿음직한 오라버니는 엄마에게 가족의 모든 것이었지요. 나는 오빠와 강아지 사이 어딘가 옹송그린 채 삼십년을 머물렀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며 ‘질투하지 말라’고 엄마는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이 주부 대상 아침 프로그램에서나 통하는 관용어였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됐을 여고시절 무렵, 문학 교과서는 내게 다시 시누이가 될 운명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시어머니 꾸중새요/ 시누 하나 뾰족새요/ 남편 하나 미련새요/ 자식 하나 우는새요/ 나 하나만 썩는샐세.

기력이 쇠하면 투플러스 한우로 고아 만든 설렁탕을 끓여 먹이고, 혹여 무더위에 지칠까봐 경관 좋고 통풍 잘되는 양지바른 곳에 쉼터를 내준 우리집 강아지의 하루를 보면 개집살이가 그리 나쁜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들은 외쳤습니다. “시집살이 개집살이!”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저항심을 4음보 연속체의 가사체로 트렌디하게 샤우팅했을 언니들의 모습을 그리며 감수성 충만한 여고생은 가슴 아팠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아, 나는 어떤 시누이가 될 것인가.

뾰족새가 되지 않으리. 며느리라는 위치에 놓였거나 놓일 모든 언니들이 칭송할 만한 ‘좋은’ 시누이에 대한 꿈이 조금 있었나 봅니다. 정작 그 시절 내 연애는 저 머나먼 태평양 심해의 차갑고 깊고 무서운 눈물바다였는데 뭔 오지랖이었나 싶습니다. 대학 다닐 때, 누나가 둘 있는 집에서 자란 남자와 이미 혼인신고를 한 친구에게 간절히 물었습니다.

“○○아, 난 좋은 시누이가 되고 싶어. 넌 시누이가 어떻게 대해주는 게 가장 좋았엄?”

털이 숭숭 난 돼지껍데기를 질겅질겅 씹던 친구는 바로, 고민 없이, 당연한 듯 말했습니다. 술은 마셨지만 우리는 취하지 않았지요.

“응, 그건 매우 쉬워. 안 만날 때. 연락 없을 때. 그러니까 넌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마.”

여성학 세미나에서도 이런 명쾌한 가르침은 없었습니다. 친구의 한마디가 은은한 달빛처럼 온몸을 포근하게 휘감았습니다. 알코올에 취해 휘적휘적 걸었던 그날 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좋은 시누이가 되는 길은 생각보다 쉽겠구나. 아니, 애초에 그런 건 가능하지 않았구나.

오빠는 사귀는 언니들을 하나둘씩 집에 데려왔습니다. 전에 만난 여자랑 비슷하게 생겼다며 장난을 치다 보니 한 언니만 남았습니다. 초롱초롱한 눈에 사슴처럼 목이 긴 언니의 나이, 이름, 직업까지 알게 됐습니다. 그 이상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도 모르겠습니다.

“언니랑 자주 연락해.” 정 많은 오빠는 장기 출장을 가면서 언니를 제게 부탁하곤 했습니다. 외국에 있는 자신 대신 언니의 생일을 축하해 달라고 했고, 행사에 대신 참석해 꽃이라도 전해 달라 했습니다. 그런데 다 까먹었습니다. 나 살기 바빴으니까요. 오빠랑 같이 셋이 만났던 적도 두어번 있는데 기억이 잘 안 납니다. 할 말이 없어서 땀이 삐질삐질 났던 것만 기억납니다. 언니도 뻘쭘해했던 것 같고요. 그러다 보니 어느덧 우리는 피가 통한 적 없는 첫번째 가족이 되어 있었습니다.

시어머니 꾸중새요 
시누 하나 뾰족새요 
남편 하나 미련새요… 
여고시절 생각했습니다 
나는 뾰족새가 되지 않으리

“넌 어떤 시누이가 좋아?” 
“안 만날 때, 연락 없을 때, 
넌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마” 
벼락같은 깨달음 준 친구의 말 
전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시누이 마음은 이런데 시어머니 마음은 또 다른가 봅니다. 맞벌이인 오빠 부부가 소식이 없으면 걱정 또 걱정을 하십니다. 딸이 밤새 술을 먹을 예정이라 오늘은 집에 못 들어간다며 전화를 드리는 와중에도 엄마는 오빠 생각을 합니다. “그래라, 근데 오빠는 잘 지낸다니?” 그만큼 엄마의 관심은 신혼인 아들네 부부에게 꽂혀 있습니다.

오빠 부부의 부탁으로 집 열쇠를 사용한 엄마가 계속 열쇠를 갖고 계시는 걸 알게 됐을 때가 생각나네요.

“돌려달라는 말을 안 해서 그냥 갖고만 있었던 거야.”

“언니한테 오늘 당장 돌려줘. 얼마나 신경 쓰이겠어.”

“내가 언제 찾아간다고 했니? 너 내 딸 맞냐?”

그날 엄마 표정은 사탕 뺏긴 5살 아이처럼 슬퍼 보였고, 아들에 대한 애정의 기원을 아는 제 마음도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엄마 편을 들 수 없을 때면 갸웃합니다. 명색이 시누이인데, 시누이 역할 놀이를 제대로 못하는 건가 싶거든요. 그럴 때면 늘 떠오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눈보라가 말처럼 힝힝거리던 겨울밤, 처음 집에 온 언니를 봤습니다. 주먹만한 얼굴에 달린 가는 목구멍 사이로 자기 얼굴의 반만한 하얀 쌀밥을 밀어넣으며 끅끅대던 언니의 모습은 참 짠했습니다. 행여 시댁 어른에게 흠이라도 잡힐까 입가에 경련 나게 두어 시간을 어색하게 웃고 있던 언니 얼굴에서 다른 공간 같은 상황에 놓여 있을 내 모습이 보였습니다.

곱고 예쁘게 자라 지금 우리집 식구와 살아준다는 감사함, 자랑할 것 없는 집 식구들과 부대낄 미안함이 언니에 대한 마음입니다. 딱 거기까지. 아름다운 추억을 꺼내보려 해도 만난 적이 별로 없군요. 달달한 시간을 보낸 것도 오빠이지 제가 아니고요. 딱 한번 뭐 필요한 것 없냐고 물어서, 신혼여행에서 돌아올 때 면세점에서 가방(명품 아닙니다)이랑 화장품(립글로스 하나)만 사다 달라고 부탁한 것 말고는 기억에 남는 대화가 없네요.

‘새언니가 착하다, 가족들에게 정말 잘한다, 나와 친한 친구처럼 지낸다’고 말하는 친구들도 주위에 있죠. 그럴 때면 저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묻습니다. “언니도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 모든 집 새언니들이 착하다는 게 말이 되냐?”

지난 주말에도 오빠는 서운하다며 카카오톡을 보내왔습니다. ‘바쁘냐/ 집에 좀 와라. 너 집들이는 왜 안 왔어/ 언니한테도 자주 좀 연락해.’ 저는 답장했습니다. ‘응/ 다음에 갈 일이 있겠지/ 계속 살다 보면 친해질 일이 있겠지.’ 오빠가 답장했습니다. ‘이게 가족이냐ㅋ’

전 당연히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언니가 행복하면 오빠가 행복하고, 오빠가 행복하면 엄마가 행복하고, 엄마가 행복하면 같이 사는 제가 행복해집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언니에 대한 관심을 접었습니다. 아직까지는 괜찮은 선택인 것 같네요. 계속 살다 보면 친해질 일 있겠죠. 뭐, 아니라면… 아니어도 서로 크게 상관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엄마랑 오빠가 이 글을 안 읽고 제 속마음을 평생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믿는 쿨한 시누이


(*한겨레신문 2013년 8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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