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방학 동안 피서다운 피서를 제대로 못 갔다.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첫째 아이의 관심과 흥미가 미술, 기획, 디자인 같은 데 있는 것 같아 
미술관이나 박물관으로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대강의 계획을 얘기했더니 신영이와 선율이가 계획을 세웠다.
(여기까지는 지난 주 이야기 "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니?"에서 얘기했던 내용)

아이들이 세운 계획은 두 가지 안이 있었다.
하나는 파주 헤이리 마을의 실내 놀이터에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앙박물관의 이슬람의 보물전에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행을 준비하며 알아보니 헤이리의 실내 놀이터는 문을 닫았다고 했다.
그래서 두 번째 안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일곱 살, 네 살 두 아이가 세운 계획에는 중앙박물관의 이슬람의 보물 전을 보고,
점심은 피자, 저녁은 만두를 먹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준비물로는 용돈과 옷을 챙겨야 한다고 했다.
신영 선율 여행 계획(추진된 것).jpg
(아이들이 마련한 여행 계획)

그리고 여행하는 데 돈이 많이 든다고 하자 
자기들이 모은 용돈 오천 원씩을 합치겠다고 했다.
신영이는 숙소에서 노는 걸 기대하니까 신영이의 오천 원은 숙소 비용에, 
선율이는 먹는 걸 좋아하니까 선율이의 오천 원은 식사 비용에 보태기로 했다.

아내와 나는 아이들이 세운 계획을 적극 반영해서 여행 일정을 짰다.
첫째 날: 어린이 발레 공연(백조의 호수) 관람, 중앙박물관 이슬람의 보물전 관람
둘째 날: 국립민속박물관의 어린이박물관 관람
발레 공연 관람을 넣은 건 유치원에서 발레를 배우고 있으니 좋아할 것 같아서였다.
이슬람의 보물전은 어린이 애니메이션 '주얼펫'에 빠져 있는 아이들이니
반짝이는 보석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걸 크게 기대하고 있어서 넣었다.


드디어 여행 가는 날이 되었다.
전날 밤,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내일은 여행가는 날이라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단단히 얘기해두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설레고 기대되는 마음 때문인지 아이들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설 때쯤 신영이가 말했다.
"엄마! 나, 너무 신나. 떨리고 긴장돼. 꿈 같아. 너무 재밌을 것 같아."
일곱 살 아이 입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여행을 떠나는 신영이의 들뜬 마음이 느껴져 부모로서 참 기쁘고, 흐뭇했다.
그리고 그토록 풍부한 감정 표현이 놀랍고, 대견했다.

집에서 서울까지 가는 승용차 안에서 
아내와 아이들은 퀴즈와 끝말잇기 놀이를 했다.
"음... 이건 둥그래. 조각으로 잘라서 먹을 수 있어. 맛있어."
"피자!"
"딩동댕!"
운전하면서 유쾌하게 노는 아이들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행복했다.
그런데 끝말잇기 하는 걸 귀 기울여 듣다가 그만 '푸훗' 웃음이 나왔다.
신영이가 '그릇!'하고 외침으로써 엄마를 이긴 것이다.


어린이 '백조의 호수' 공연은 내가 신영이, 선율이와 함께 보았다.
그동안 아내는 막내 수현이와 함께 로비에서 놀았다.
아내 말이, 다른 집은 다들 아빠가 어린 아이와 함께 로비에 있었고, 
엄마가 기다린 경우는 자기 뿐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난 발레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신영이는 시선을 고정하고 몰입하며 보았고,
선율이는 별 대사 없이 춤이 계속되는 게 지루했는지 가만히 앉아있지 못했다.

이촌역 부근에 사는 친구네 가족을 만나 점심으로 짜장면과 만두를 먹고, 
중앙박물관에 갔다.
역에서 나와 박물관이 보이자 신영이는 '기대된다!'며 설레는 마음을 드러냈다.
'이슬람의 보물'이라는 기획 전시가 
일곱 살, 네 살 아이들이 이해할 만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이 전시를 보고 싶어한 건 애니메이션 '주얼펫'의 영향 때문이다.
루비, 산호, 사피 같은 보석 이름을 딴 캐릭터들이 나오는데,
아이들은 그 보석들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 거다.
특히 신영이는 전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이건 루비다!', '이건 사파이어야.'하며
아내의 스마트폰으로 촬영까지 했다. 
신영이가 찍은 보석 사진.jpg
(이슬람의 보물전에서 신영이가 촬영한 보석 사진)

아라베스크 무늬가 수놓인 카펫을 보며 감탄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내와 나는 '여기 데려오길 참 잘했다.'는 애길 나누었다.
전시를 다 본 뒤 아이들에게 박물관 문화상품점에서 기념품을 고르게 했다.
신영이는 아라베스크 무늬가 있는 만화경과 인형을, 
선율이는 아라베스크 무늬 연필 세 자루와 인형을 샀다.
박물관 기념품-만화경과 연필(이어붙인 것).jpg
(이슬람의 보물전을 보고 난 뒤 기념품으로 산 만화경과 연필, 인형)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차를 세워둔 친구네 아파트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놀이터가 보였다.
아이들이 놀다 가자고 했다.
아내와 나는 다리도 아프고, 지치기도 해서 수현이와 함께 벤치에 앉았다.
신영이, 선율이는 지치지도 않는지 철봉도 하고, 그네도 타며 놀았다.
신영이가 평행봉을 가볍게 휙~ 하고 올라가자 
옆에 있던 서너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초등학생 아이와 그 엄마가 화들짝 놀라는 게 보였다.
시골 바깥놀이로 단련된 우리 아이들, 
피부가 까매진 만큼 몸도 단단해진 것 같아 기특했다.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 아내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내: "오늘 뭐가 제일 좋았어?"
선율: "놀이터!" (내 이럴 줄 알았다. 네 살 아이에게는 야심차게 준비한 발레와 박물관보다 좋은 건 역시 놀이터였던 것이다.)
신영: "난 이슬람의 보물!"(그나마 첫째 딸의 대답이 위안이 되는군.) 


둘째 날엔 국립 민속박물관의 어린이박물관에 갔다.
'흥부 이야기 속으로' 전시실에서 박 타기 체험, 종이로 제비 접기 같은 걸 하고,
하나의 전시를 더 본 뒤 야외로 나왔다.
이삼십 명의 아이들이 굴렁쇠, 제기, 팽이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난 굴렁쇠에 눈독을 들였다.
오랜만에 해보고 싶어서 아내에게 '여보, 굴렁쇠 한 번 해보고 가자.'고 했다.
굴렁쇠는 두 개가 있었는데, 여러 아이가 굴렁쇠를 잡았지만,
제대로 굴릴 줄 아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아이들이 굴렁쇠를 내려놓기만 기다리고 있다가 한 아이가 내려놓자
재빨리 뛰어가 굴렁쇠와 막대기를 집어 들었다.
내가 굴렁쇠를 굴리기 시작하자 한 아이가 외쳤다.
"야~ 대박! 저 아저씨 짱이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와~'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거기 있던 아이들이 
내게로 몰려들었다.
'녀석들, 이 정도는 기본이지. ㅋㅋ'
단체 관람 온 아이들이 빠져나간 뒤 신영이에게 굴렁쇠 굴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굴렁쇠를 굴리다 보면 막대기가 저절로 올라가는데, 그렇게 하면 안 돼.
막대기를 굴렁쇠 아랫 부분에 계속 대주어야 쭈욱 밀고 갈 수 있어."
처음엔 그냥 넘어가다가 차츰 굴렁쇠가 앞으로 조금 나가는 걸 보자
신영이가 재미있어 했다.
어렸을 때 내가 가지고 놀던 식으로
집에 있는 고장 난 자전거 바퀴를 빼내서 굴렁쇠를 만들어주고 싶어졌다.
민속박물관-굴렁쇠와 야외 석물(이어붙인 것).jpg
(민속박물관에서 굴렁쇠 놀이(왼쪽), 야외 전시장(오른쪽)

점심으로 아이들과 약속한 피자를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온 뒤 아이들은 여행 경험을 그림으로 그렸다.
신영이의 그림에는 이슬람의 보물전을 관람하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 
행복한 표정으로 그려져 있었다.
신영이가 그린 이스람의 보물전.jpg
(신영이가 그린 그림. 이슬람의 보물전을 보는 우리 가족)

선율이의 그림에는 발레 공연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선율이가 그린 발레 공연.jpg
(선율이가 그린 그림. 발레 공연 모습)


아이들이 여행을 즐거운 경험으로 기억하는 모습을 보니 기쁘고, 흐뭇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여행 참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좋았지만,
여행을 상상하며 아이들이 기쁘게 여행 계획을 짜고,
출발하면서 여행에 대한 설렘과 기대를 표현하고, 
박물관과 놀이터에서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여행을 상상하고 준비한 순간부터 여행을 다녀온 지금까지 
아이들도, 아내와 나도 참으로 행복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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