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의 학부모 참여 프로그램 중에 '책 읽어주는 엄마'가 있다.
작년부터 운영되고 있는데, 작년에는 막내가 갓난아기였을 때라 참여하지 않다가
올해 참가 신청을 했다.
'책 읽어주는 엄마'에 참가하는 유일한 아빠가 된 것이다.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경험하지 못 할 특별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내가 그림책을 읽어줄 기회는 1학기 동안 두 번 있었다.


첫 번째.
'다음 주 화요일이 아버님께서 책 읽어주시는 날이에요.'
선생님의 예고를 듣고 무슨 책을 읽어줄까 생각하다 두 권으로 후보를 압축했다.
<고 녀석 맛있겠다>와 <모치모치 나무>.
둘 다 좋은 책이지만, 공룡이 나오는 이야기를 아이들이 더 좋아할 것 같아 <고 녀석 맛있겠다>를 가져가기로 했다.
요새 TV에서도 방영한다니 알고 있는 아이들도 있을 것 같았다.


아침에 출근하는 아내가 '오늘 잘 하고 와, 여보.'라고 응원하는데,
애써 무심한 척 '그래.'하고 대답했지만, 은근 떨렸다.
평소 아이들 데려다 줄 땐 티셔츠에, 머리 손질도 안 하고 다니지만,
이날은 셔츠에 자켓을 입고, 머리에 왁스도 발랐다.
아이들 앞에 선다고 생각하니 제대로 갖춰 입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첫 인사를 뭘로 할지, 그리고 그림책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할지 궁리해보았다.
'어린이 친구들, 요즘 슬펐던 적 있어요? 오늘은 슬픈 이야기가 있는 그림책을 읽어주려고 해요.'
신영이에게 유치원 선생님이 아이들 부를 때 뭐라 하는지도 물어보았다.
"신영아, 유치원 선생님이 너희들 부르면 너희가 '네네, 선생님!'하고 대답하잖아. 
선생님이 뭐라고 하면 너희가 그렇게 대답하는 거야? '친구들을 부르면!'이야?"
"친구들을 부르면인가, 유치원을 부르면인가 헷갈려."
옆에서 듣고 있던 선율이가 '친구들을 부르면이야.' 하고 알려주었다.

설거지, 빨래 널기를 다 하고 두 살 된 수현이를 데리고 유치원에 가자 
선생님께서 수현이를 데려가 놀아주셨다.
나는 둥그렇게 둘러앉은 아이들 앞에 준비되어 있는 어린이 의자에 앉았다.
벌써 그림책을 본 아이들이 소리쳤다.
"<고 녀석 맛있겠다>다."
"나 저거 TV에서 봤는데."
아이들의 반응에 나도 반응해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TV에서 봤어요? 이 책에 있는 이게 뭐지요?"하고 물으니
"공룡이요."하고 답한다.
"어린이 친구들, 요즘에 슬펐던 적 있어요?"하고 묻자
처음엔 "없어요."하고 답했다가
한 아이가 "있었어요." 하자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저도요.", "저도 있었어요." 한다.
"오늘은 공룡이 나오는, 슬픈 이야기가 있는 그림책을 읽어줄 거예요.
아저씨가 누군지 알지요? 아저씨는 신영이, 선율이 아빠예요."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책을 크게 펼쳐 들고 읽기 시작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
'화산이 쾅쾅 콰콰쾅, 지진이 우룽우룽우룽' 하는 소리에 아이들이 웃기 시작했다.
덕분에 좀 긴장되었던 마음이 내려갔다.
아이들은 여러 장면에서 재미있어 하며 깔깔 웃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이 웃음을 그치길 기다리거나 '잘 들어주세요.'하고 나서 이어 읽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아기 안킬로사우루스가 진짜 엄마 아빠를 만나는 장면에서 아이들은
"엄마 아빠다."하고 외쳤다.
어른인 내 눈에는 아기 안킬로사우루스가 자신을 돌봐주던 티라노사우루스와 헤어지는 장면이 짠하고 슬픈데,
아이들에게는 그것보다는 진짜 엄마아빠를 만나는 장면이 더 눈에 띄는 것 같았다.
진짜 엄마아빠를 만나는 반가움이 더 크기 때문일 거라 짐작해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를 아무리 잘 키우고 돌봐주어도 엄마, 아빠한테 가면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는 거들떠도 안 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서운해 한다고 하던데,
아마 이 장면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이 그와 비슷한 상황일 것 같다.


다 읽은 뒤 어느 부분이 재미있었는지 묻자
''고 녀석 맛있겠다'라고 이름을 불렀을 때' 라고 답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아이들과 인사를 마치고 선생님과 차를 마시며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선생님은 우리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말씀해주셨다.
네 살인 선율이가 가장 어린데도 발표를 가장 많이 하려 한다는 것이다.
언니, 오빠들만 있고, 또래는 없는 유치원에서 잘 적응하나 걱정했는데,
씩씩하게 잘 생활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차 마시는 동안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각 영역에서 삼삼오오 모여 앉아 그림 그리고, 만들기 하고, 역할 놀이도 하면서
자기들끼리 대화하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아이들이 여유롭게 노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시골의 작은 공립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꽉 짜여진 프로그램이 아니어도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으리라 믿는다.
 


두 번째.
처음 읽어주러 갈 때는 긴장이 되었는데, 두 번째이고 보니 설레고, 즐거운 마음이 더 컸다.
휴직 중이어서 평소에 교사 정체성보다는 아빠 정체성이 더 많이 나타나는데, 
이날은 유치원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수업을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들뜨기까지 했다.

그 주의 교육활동이 '동식물과 자연'이길래 연관된 그림책들을 뽑아보았다.
집에 있는 그림책 중에서 <다람쥐>, <마술 연필>, <구룬파 유치원>, <고슴도치의 알> 네 권을 후보로 골라놓고,
다시 그 중에 한 권을 골랐다.
<고슴도치의 알>을 읽어주기로 했다.
책 읽어주는 아빠(1학기).jpg

유치원 아이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걸 확인한 뒤 아이들에게 물었다.
"어린이 친구들, 좋아하는 동물 있죠? 무슨 동물 좋아해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고양이요."
"멍멍이요."
"악어랑 상어요."
"사자하고 호랑이요."
고양이와 강아지라는 대답이 특히 많이 나오길래 
"고양이랑 강아지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네요?"하고 대꾸해주자
"고슴도치요."라고 대답하는 아이가 있었다.
그러자 또 한 아이도 "저도 고슴도치 좋아해요." 한다.
"아, 고슴도치 좋아하는 친구도 있네요? 오늘은 아저씨가 고슴도치가 나오는 그림책을 가져왔어요.
지금부터 읽어줄테니까 조용히 잘 듣고, 궁금한 게 있으면 다 읽고나서 물어봐주세요."

책을 다 읽고 나서 질문을 받아보았더니 한 아이가 이렇게 물었다.
"근데 밤송이 속에 애벌레가 어떻게 들어가요?"
아주 반가운 질문이었다. 
나도 어렸을 때 궁금했지만, 잊고 있던 물음이었다.
그러다가 우리집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그 답을 알게 된 바로 그 물음이었다.

답을 바로 말하지 않고 아이들의 생각을 물었다.
"아, 정말 궁금하지요? 밤송이는 딱딱하고 구멍이 없는데, 어떻게 그 속에 애벌레가 들어갔을까요?"
그러자 아이들이 알쏭달쏭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려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다.
곧 몇몇 아이들이 대답을 했다.
"구멍을 뚫고 들어갔어요."
"아, 구멍을 뚫고 들어가요? 그래요. 구멍을 뚫고 들어가면 되지요.
그런데 밤송이에 구멍이 없는데, 그 안에 애벌레가 있는 것도 있어요. 그건 어떻게 들어갔을까요?"
아이들의 질문을 다시 아이들에게 되물으며 아이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다.

그러자 한 아이가 대답했다.
"다 들어가서 테이프를 붙여요."
속으로 큭큭, 웃었다. 아이다운 재미있는 발상이었다.
"아, 들어간 뒤에 테이프를 붙인 것 같아요? 그럼 구멍이 안 보이겠네요."
또 다른 아이가 대답을 했다.
"종이로 붙여요."
"아, 종이로 붙이는 방법도 있어요?"
내가 대꾸를 해줄 때마다 아이들은 대답을 계속했다.
"바람이 불 때 들어가요."
이 대답에 다른 아이가 토를 달았다.
"야, 근데 바람이 불면 애벌레도 날아가지."
이때, 내가 끼어들었다.
"바람이 불 때 들어가려 하면 날아갈 수도 있겠네요?
자, 여러 친구들이 자기 생각들을 얘기해주었어요. 
그런데 원래 아저씨도 어떻게 애벌레가 밤이나 사과 속으로 들어가는지 궁금했는데 
얼마 전에 그림책을 읽고 알게 되었어요. 이제 아저씨가 얘기해줄까요?"
"예!"

아이들 뒤에서 두 살 된 막내 수현이랑 놀아주고 계시던 선생님도 호기심이 이는지 
이쪽을 쳐다보고 들을 준비를 하셨다.
"과일 열매가 맺기 전에 꽃이 피잖아요. 그 꽃에 나비가 알을 낳지요? 
그러면 꽃 속에 알이 있다가 꽃이 열매가 되면서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구멍이 없는데도 열매 속에 애벌레가 들어있는 거예요. 이제 알겠지요?"
"예!"
"아까 OO가 이걸 물어봐줘서 우리 친구들이 다같이 궁금한 걸 한 가지 알게 되었어요. 
자, 그럼 또 궁금한 게 있나요? 없으면 아저씨는 여기까지 읽고 갈게요. 인사할까요? 차렷, 인사."
"안녕히 가세요."

오랜만에 수업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그림책을 통해 아이들의 생각을 듣고, 함께 대화하면서
아이들에 대해, 그리고 아이들이 어떻게 배워가는지에 대해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다음에는 애벌레가 어떻게 과일 속에 들어가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책 
<사과와 나비>를 들고가서 읽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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