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아이들에게 양성 평등에 대한 글쓰기 수행평가 과제를 내준 적이 있다.
신기하게도 여러 명의 아이들이 적어온 사례가 아주 비슷했다.
아마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왔을 그 사례는 이런 것이었다.
여자가 운전을 하다 속도가 늦거나 사고를 내면 
상대방 남자 운전자가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아니, 여자가 집에서 밥이나 할 것이지...", 혹은 "여자가 집에서 애나 볼 것이지..."
속으로 '요즘에도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은 황당한 사례를 
여러 명의 아이들이 판박이처럼 비슷하게 써온 걸 보며
쓴 웃음을 지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휴직하고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 하던 작년,
나도 황당한 경험을 했다.
시골 유치원들의 합동 운동회가 있어서 아이와 함께 참석했다.
이벤트 업체에서 행사를 주관했는데, 
사회자가 부모님 중에 조장을 하실 분을 뽑아달라고 주문했다.
다들 우물쭈물하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나 역시 '엄마 아빠가 같이 온 가족 중에 나가거나 부모의 다수를 차지하는 엄마들 중에 누가 나가겠지.' 생각하며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유치원의 아이 엄마가 내 손목을 잡아 끌며 
"이런 건 남자가 하는 거예요. 어서 안 나가고 뭐 해요? 얼른 나가요." 하는 게 아닌가?
모르는 학부모가 '이런 일은 남자가 해야 한다.'며 등 떠미는 그 상황이 
상당히 불쾌하고, 어이가 없었다.
순간 '불쾌함을 표현해야 하나,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나?'를 두고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에 일어났다.

결국 다른 조에서도 아빠들이 나오고,
아이들을 위한 운동회 자리에서 부모끼리 옥신각신 하는 게 썩 내키지도 않아서 
그냥 조장으로 나서기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하지만 운동회 내내 찜찜하고, 불쾌했다.
모르는 사람의 등을 떠미는 그 아이 엄마의 무례함에 화가 났고,
조장 역할을 '남자가 하는 일'로 규정하는 고정 관념은 황당했다.
'참석한 학부모들 중에 아빠보다 엄마들의 수가 훨씬 많은데, 
그 엄마들은 나서지 않고, '남자가 해야 한다.'고 말하다니...
어떤 직종이나 분야에서 남성이 다수이거나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혜택을 보는 상황이 여성에게 불평등한 것이라면,
반대로 여성이 다수인 상황에서 소수인 남성에게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특정한 일을 강요하는 것 역시 남성에게 불평등한 것 아닌가?
그리고 '남 앞에 나서거나 무리를 이끄는 일은 남성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의존적인 태도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 이어지면서 그 아이 엄마의 태도가 몹시 실망스러웠다.

처음부터 무례한 요청을 거절하지 않은 내 선택이 좀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내년에도 비슷한 일이 생길 경우에 내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단호하게 거절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올해 운동회는 합동으로 하지도, 이벤트 업체가 주관하지도 않았고,
학부모 조장을 뽑는 일도 없어서 그런 결연한 각오가 무색해졌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첫째 아이가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를 집에 와 부르는데, 가사가 귀에 걸렸다.
'내가 커서 어른 되면 아빠처럼 넥타이 메고 있을까, 엄마처럼 행주치마 입고 있을까...'
아이는 배워온 노래를 재미있게 부르고 있었지만,
그걸 듣는 나와 아내는 좀 황당하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했다.
'이런 노래를 계속 부르도록 내버려둬야 하나?'

검색해 보니 그 노래의 가사는 아래와 같았다.
"내가 커서 어른 되면 어떻게 될까
아빠처럼 넥타이 메고 있을까
엄마처럼 행주치마 입고 있을까
랄랄라 다같이 흉내내보자
나는 엄마
나도 엄마
아빠 다녀오세요 호호
나는 아빠
나는 아빠
여보여보 다녀왔소."

아마 유치원에서 엄마, 아빠의 역할을 배우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노래 가사는 맞벌이 부부가 많아지고, 
성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도 변하고 있는 시대 상황과는 맞지 않아 보였다.
바뀐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새로운 동요가 아직 많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유치원에서도 별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육아와 살림을 하고 있는 아빠의 입장에서는 
아이가 '엄마처럼 행주치마 입고 있을까'라는 노래를 부르는 상황이 썩 개운치 않았다.

1년이 지난 며칠 전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신영아, 작년에 '아빠처럼 넥타이 메고 있을까, 
엄마처럼 행주치마 입고 있을까?'하며 불렀던 노래 있잖아. 그거 기억나니?"
"아니, 생각 안나는데?"
"아, 그래? ..."

그 노래를 부르지 않길 바라는 아빠의 마음을 신영이는 몰랐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노래는 자연스레 잊은 듯 했다.
하지만 여러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그 노래는 계속 불리고 있을 것 같다.
'바깥일=남자일, 집안일=여자일'이라는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새로운 동요가 어서 빨리 만들어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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