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토요판/가족]남편의 비자금
당신이 횡령해간 내 돈, 재산으로 몽땅 돌려줘

▶ 물론 남편의 비자금은 그분의 비자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기업에서 뇌물을 받아 비자금을 만든 혐의로 1997년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은 그분 말입니다. 전재산이 29만1000원이라며 1672억원을 아직도 미납하신 그분 말입니다.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분의 비자금으로 추정되는 은닉재산이 9334억원에 이른다고 주장하기도 했네요. 규모야 하늘과 땅 차이지만 그 배신감은 부인이나 국민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부모님 집을 지어드렸다고? 시동생 사업자금 대줬다고?
남편은 나 몰래 비자금 만들어 20년을 시가에 퍼다주었다 

함께 뼈 빠지게 일해 번 돈…거짓말로 뒤통수친 것도 모자라
자기가 번 돈 자기가 쓴 거라는
당당함에 마음이 더 아프다

“부모님 집은 내가 지어준 거니까 돌아가신 뒤엔 내 몫이야.”

거나하게 취한 남편의 말에 이영숙(가명)씨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부모님 집? 지어줬다고? 언제? 무슨 돈으로? 머릿속엔 의문이 꼬리를 물었고 온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겨우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무슨 소리냐?”였다. 영숙씨의 말에 이번엔 술을 마시던 남편과 남편 형제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예전에 부모님 집 새로 지을 때 내가 1억 드렸어.”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1억? 1억이라니!

결혼한 지 20년이 다 돼가는 40대 영숙씨 부부는 농사꾼이다. 처음엔 작은 땅에서 농사를 지었지만, 돈을 벌면서 땅을 조금씩 사서 넓혔다. 소농이 대농이 돼가면서 영숙씨도 나가 일을 거들었다. 시골인데다 농사짓는 일이라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뭘 심을지 결정하고 내다 파는 것은 남편의 몫이었지만, 영숙씨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직장인처럼 하루종일 나가 일했다. 농사 소득이라는 게 월급처럼 따박따박 정해진 날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돈 관리는 남편이 했고 한달 생활비를 받아 썼다. 돈이 적다는 생각은 안 했다. 시골 생활이 돈이 많이 들지도 않았고, 영숙씨는 일하느라 특별히 사치할 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돈이 생기면 땅을 샀다. 땅이 점점 넓어지니까 사업이 잘된다고 생각해 영숙씨도 뿌듯했다. 다른 곳에 돈을 쓸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오랫동안 영숙씨는 생활비 아껴 한푼씩 모으는 재미와 사업 확장에 행복해했다.

남편이 자기 몰래 ‘비자금’을 만들었다는 건 20년 만에 처음 알았다. 1억이 끝이 아니었다. 시동생 사업자금이나 생활비도 그동안 꾸준히 보태주고 있었다. 남편은 사업자금으로 6000만원 정도 빌려줬고, 생활비는 3000만원 정도였다고 말했다. 남편의 말을 더는 믿을 수 없었다. 그 긴 세월 준 돈이 영숙씨 생각엔 3억이 넘을 것 같았다. 비자금을 만든 것도 모자라서, 그 돈을 다 시가에 퍼다주었다. 만약 술김에 한 그 말을 듣지 못했다면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었을 거란 생각에 더 배신감이 들었다.

그래, 생각해보니 수상한 게 많았다. 명절 때나 집안 행사 때 남편 식구들과 모이면 자기들끼리 늘 속닥속닥했다. 형제들 간에 우애가 깊으니 그러겠거니 싶다가도, 어떨 땐 지나치게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도 같았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자기들끼리 돈 얘길 했던 거였다. 시동생을 찾아 따져 물었다. 사업자금을 빌려준 시동생은 “아직 돈을 갚을 만큼 큰돈을 못 번데다 형이 안 줘도 된다고 말했다”고 변명했고, 다른 시동생은 끝내 “조카 용돈이 되면 얼마나 되겠냐”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돈 액수에 대해서는 입을 딱 다무는 바람에 대체 그 규모가 얼마가 될지 산정이 안 됐다. 참으로 ‘우애 좋은’ 형제들이었다.

남 탓을 할 일이 아니다. 남편부터가 배째라였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했더니 “내가 그걸 왜 너한테 얘기해야 해?”라는 답이 돌아왔다. 농사를 기획하는 것도, 판로를 뚫는 것도 자신이 했으니 그 돈도 다 자신의 것 아니냐는 논리였다. 생활비 한번 빠진 적 없이 꼬박꼬박 주지 않았느냐고 강변했다. 내가 그동안 나가 뼈빠지게 일한 건 ‘부수적인 일’로 취급됐다. 결혼 뒤 쉴 틈 없이 나가 일한 세월이 얼마인데 혼자 일했다니, 그게 다 자기 돈이라니….

남편은 시부모에게는 최고의 아들, 시동생들에겐 최고의 형이었다. 시집은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다. 그나마 장남인 자신이 돈을 버니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남편은 주장했다. 가족? 우리 세 식구는 가족이 아니라 남인가? 그 가족에는 남편 가족만 포함되고 우리 집은 포함 안 되나? 결혼 뒤 친정에 용돈 한번 안 준 남편이다. 친정에 큰 빚이 생겼을 때도 “나는 돈 못 준다”며 냉정하게 굴었던 남편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자기 집에는 그렇게 돈을 집어넣었는지….

“나가서 술 마시고 여자랑 논 것도 아닌데, 시댁에 돈 쓴 게 그렇게 아까워? 자식이 부모한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사는 게 뭐가 나빠?” 영숙씨는 남편의 말에 또 한번 상처를 받았다. 몇억씩이나 되는 돈은 일단 그 자체로 적지 않았다. 그 돈만 있었다면 땅을 더 사든 집을 늘리든 생활이 더 나아졌을 거다. 돈도 돈이지만 배신감이 너무 컸다. 신뢰의 문제였다. 20년 동안 나를 속였다. 한두번도 아니고 이렇게 오랜 기간 말을 안 한 거라면 의도적이다. 돈도 속이는데 다른 거라고 못 속일까? 물질 가는 곳에 마음 간다는데, 남편은 내게 마음이 없어서 돈을 다른 데다 쓴 걸까도 싶었다. 무엇보다 엄연히 함께 일해서 번 돈이었다. 내가 받을 돈을, 우리 가족이 쓸 돈을 나와 상의 없이 시집에다 ‘횡령’했단 느낌까지 들었다. 일은 내가 다 하고, 그 열매는 다른 사람이 쪽쪽 빼먹었다.

“이 집하고 땅 절반 내 명의로 바꿔줘. 싫으면 이혼이야.” 남편 명의로 돼 있던 재산을 반으로 나누자고, 영숙씨는 남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끊어진 신뢰의 끈을 “앞으로는 안 줄게”라는 말 한마디로 이을 수 없었다. 앞으로 안 그런다는 보장도 없으니 딴짓 못하도록 좀더 확실한 게 필요했다. 긴 세월 속고 산 내가 불쌍하고 가여워서라도 뭐라도 내 것으로 먼저 만들어 둬야겠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도움말 주신 분 서울가정문제상담소 김미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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