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마음을 풀어주는 거야

딸 : 파워레인저 보고 싶다.

엄마 : 지난 번에 봤잖아. 매주 보는 게 아니거든.

딸 : “파워레인저 보고 싶어요”가 아니라 내가 실지로 보고 싶다고 말한 거야.

엄마 : 아 그러면 엄마는 “서령이가 파워레인저 보고 싶은 마음 알겠어” 그러면 되는 거네.

딸 : 그게 마음을 풀어주는 거야.

 

나는 공주다   

책 한 권이 발단이었다. 작년 12월 딸아이는 엄마와 같이 서점에 갔다가 색칠 그림책을 골랐다. 이 책에는 모두 4명의 공주가 등장하는데, 장미나라 로지 공주, 해바라기나라 써니아 공주, 튤립나라 튜리 공주, 꽃의 나라 로지공주가 주인공이었다. 4명의 공주는 하나같이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를 입었다.

딸 : 아빠, 어린이집에 치마 입고 갈거야!

아빠 : 어, 그래.

딸 : 공주는 치마 입는 거야.

그전에는 한 번도 치마를 입은 적이 없었고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후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에 갈 때까지 두 달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치마만 입었다. 치마를 입는 건 좋은데 바지는 입지 않겠다고 우길 때가 종종 있었다.

딸 : 바지 안 안입고 치마만 입고 갈거야.

아빠 : 겨울인데 바지 입어야 해. 추워.

딸 : 공주는 바지 안입어. 치마만 입는 거야.

패션을 위해 추위쯤은 견디겠다는 기세였다. 그러더니 내 앞에 문제의 공주책을 펼쳐 놓았다.

딸 : 봐봐. 바지 안입잖아.

아빠 : 서령아, 그건 여름이어서 그런거야. 겨울에는 공주들도 바지 입는단 말이야.

그 책 참 바지 입은 그림 하나만이라도 그리던지. 딸아이의 공주 패션은 유치원에 올라가면서 위기를 맞았다. 유치원은 5일 가운데 딱 하루만 자유복을 입었다.

딸 : 아빠, 나 치마 입고 가고 싶어.

아빠 : 서령아, 하루는 그럴 수 있지만 다른 날은 원복하고 생활복 입어야 해.

딸 : 난 치마입고 싶어. 왜 원복 입어야 해! 나 원복 입기 싫어.

아빠 : 다른 친구들도 그렇게 입기로 약속했어. 약속은 지켜야 하잖아. 그러면 원복 치마 입자.

딸 : 그건 입기 싫어. 안 예뻐.

아빠 : 난 예쁘던데.

딸아이 입장에서는 자기가 그렇게 약속한 적이 없어서 억울할 수 있겠다. 딸아이의 말도 일리가 있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내가 입겠다는데. 원복은 유치원 입장에서는 관리가 편하고 부모 입장에서는 신경 덜 써서 좋기는 한데.

며칠 전이었다. 외할머니가 여름 원피스를 보내 주셨다. 딸아이 레이더에 이 옷이 걸렸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딸 : 엄마, 나 이 옷 입고 유치원에 갈 거야.

엄마 : 그래, 내일 입고 가자.

딸 : 공원에 나가서 놀자. 이 옷 입고 공원에 갈거야.

엄마 : 흙 묻으면 유치원에 못 입고 가는데.

딸 : 흙 안묻게 할 거야. 안앉으면 되지.

기어코 딸아이는 여름 원피스를 입고 밖으로 나갔다. 설득 끝에 안에는 긴 팔 옷을 입고 바지를 입었다. 공원에서 돌아온 딸아이 원피스에는 흙이 잔뜩 묻었지만 딸아이 각오는 여전했다.

딸 : 내일 이거 입고 갈거야. 선생님이 예쁘다고 할거야.

 

책 한 권의 영향, 예상보다 강력하고 오래간다. 공주 그림책을 만드는 분들, 공주가 늘 치마만 입는 건 아니잖아요, 바지 입은 공주도 그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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