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향, 일어나~ 밥 먹자!
토요일 아침, 일어나기 싫어서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리는데 밥 먹으라는 좌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밥 없어, 밥 해, 밥 줘, 아니고 밥 먹자 라니, 얼마나 좋은가! 느릿느릿 이불 속에서 빠져나와 옥상으로 향한다. 옥상에 평상이 있으니 주말이면 집에 있기보다 위에 올라가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옥상에서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책 읽고 그림도 그리고! 옥상에 대한 좌린의 사랑은 특히 남다르셔서 지난밤, 늦게 들어와 보니 옥상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이들 재우고 혼자 올라와 놀다가 시원하고 편안하여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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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잔~ 남편께서 준비하신 주말 아침 밥상은 양푼 비빔밥! 우리 밭에서 난 각종 쌈 채소에 고기를 볶아 넣고, 어머님께서 직접 농사지어 짜 주신 참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린 ‘특제 비빕밥’이란다.
양푼에 숟가락 꽂아 넷이서 나눠 먹는다. 고추장을 넣어 조금 맵지만 아이들도 엄마, 아빠한테 질세라 열심히 떠먹는다.

 

참 달콤한 토요일 아침이로구나. 기분 좋게 늦잠을 자고 남편 차려주신 아침상을 받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게다가 화분에서 각종채소들이 쑥쑥 자라고 있는 눈앞의 풍경은 또 얼마나 여유롭고 멋지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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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 꽃 봐! 불꽃놀이 같지 않아?
‘불꽃놀이 꽃’이라 부르는 이 흰 꽃은 당귀에서 올라왔다. 작년에 3층 아주머니가 모종 사다 심으셨는데 올 초에 이사 가면서 우리를 주셨다. 겨울을 나고 봄에 새순이 돋더니 꽃대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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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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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에도 꽃이 피었다.
이제 곧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보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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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호박꽃도 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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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비!
와, 예쁘다. 우리가 채소를 심었더니 나비들도 날아오네!
배추 흰 나비 한 마리가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모습은 지극히 아름답고 평화롭지만, 텃밭 농사 4년 차, 이제 뭘 좀 알 것 같은 농사꾼의 마음엔 두둥, 먹구름이 몰려온다. 그래, 열무!
톡토기라는 별명을 가진 벼룩 잎벌레의 피해가 심해 올핸 열무를 밭에 조금만 심고 옥상 화분에 심은 것이다. 나비 애벌레가 배추와 열무를 좋아한다는 생각이 떠올라 벌떡 일어나서 열무 잎을 들춰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열무 잎에 꼼짝 않고 붙어 있는 애벌레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열무를 언제 심었더라? 4월 둘째 주에 심었으니, 이제 뽑을 때가 됐네. 열무는 생육기간이 짧아 씨 뿌려서 한 달 보름이면 수확을 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고 보니 화분에서 빽빽하게 자란 열무들이 뽑아달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다.

열무김치, 열무김치! 김치를 담가 달라는 건 남편의 아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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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는 해람이가 뿌렸는데 거두는 건 아루가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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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에 심은 데다 귀찮아서 중간에 솎질 않았더니 줄기가 가늘고 튼실하진 않지만, 그래도 모아놓고 보니 양이 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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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람이는 옆에서 애벌레를 모았다. 깎아 놓은 손톱 마냥 조그만 것에서부터 몇 번 탈피를 거쳤는지 제법 통통한 녀석까지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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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누구의 알인지, 자연의 규칙성이 놀랍다.

 

 

두 해 전 여름, 처음 열무김치를 담그며 얼마나 허둥거렸던가!

손질한 열무를 물에 살살 씻어 건지며 처음 내 손으로 김치를 담갔던 일을 떠올린다.

 

옥상에서 화분에 채소 몇 가지 키워보다가 재작년에 처음으로 구청에서 관리하는 도시텃밭을 분양받았다. 누가 시키는 대로 열무 열 줄, 얼갈이배추 다섯 줄을 심었는데 순식간에 무럭무럭 자라 어느 날 밭에 갔더니 그만 거둘 때가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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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시장에 파는 걸로 따지면 몇 단이나 되는 거지? 이렇게 조그만 땅에서 이렇게 많은 먹을거리가 나오다니! 감동에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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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해 전, 네 살 해람이. 열무 뽑다가 몇 번이나 나동그라졌다.

 

 

수확이 기쁘고 감격스럽지만, 이 많은 열무로 김치를 직접 담가야 한다는 사실은 심히 걱정스러웠다. 엄마, 시어머니, 언니, 친구, 김치를 담글 줄 아는 친지들에게 전화를 걸어 열무김치 담그는 방법을 물었다.

진향아, 걱정하지 마. 세상에 열무김치가 가장 쉽단다.
그때 시어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에 얼마나 큰 용기를 얻었는지! 솔직히 다른 말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쉬우니 걱정 말라는 어머님 말씀은 귀에 쏙 들어왔고 지금까지도 김치를 담글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리며 용기를 얻는다.
열무를 소금에 절인다, 밀가루 풀을 식혀 고춧가루, 마늘, 생강, 양파나 쪽파를 넣고 절인 열무에 붓는다. 레시피는 단 한 줄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지만, 소금을 얼마나 넣어 절이는지, 밀가루 풀을 어느 정도 쑤어야 하는 지 감이 없어 힘들었다. 요령 있게 일을 잘하는 스타일도 아닌데다 한꺼번에 많은 채소를 감당할 양푼(다라이), 채반도 없어 집안의 큰 그릇이란 큰 그릇은 다 꺼내놓고 부엌과 뒤 베란다의 싱크대를 정신없이 오가며 수선을 떨었다.
그래도 한 번 김치 담그는 소동을 겪고 나니 자신감이 생겨, 이제는 열무김치, 오이소박이, 알타리무김치, 내가 농사지은 채소들로 손수 김치를 담가 먹는다.

농사도 그렇고 김치도 그렇고 매뉴얼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내 몸으로 익혀야 한다. 정확히 계량해서가 아니라 ‘적당히’ 하는 게 낯선 방식이지만, 자꾸 해보면서 ‘적당히’를 체득하고 있다.
열무를 너무 주무르면 풋내가 나니까 절이지 않아도 된다, 고춧가루보다 생고추 갈아 넣으면 더 맛있다, 2년 전에 엄마가 해주신 이야기가 이제야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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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커다란 양푼과 채반은 장만하지 못했지만, 대신, 있는 그릇들을 가지고 퍼즐 맞추듯 옮겨가며 일을 하는 노하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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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시작한 김치 담그기가 밤까지 이어졌다. 낮잠 한 숨자고 텃밭의 배추와 열무까지 뽑아 오느라 시간이 걸린 것이다.

텃밭에서 자란 열무는 노지에서 자라 확실히 색도 짙고 줄기도 굵고 건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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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내가 김치를 담그는 동안 좌린이 노래를 부른다. 위문 공연을 하고 계심. 간 본다는 핑계로 한잔 드셨다!

 

거참, 신기하네. 소금, 고춧가루에 기본양념만 넣고 만드는데 그런 풍부한 맛이 난단 말이지.
잘 익은 열무김치를 상상하며 좌린이 말했다.

그게 바로 미생물의 힘이지. 그리고 바로 이 손맛 아니겠어?
고춧가루 양념으로 빨갛게 물든 손을 들어 보이며 자랑스럽게 대꾸했지만, 나는 알고 있다.

 

해람이가 씨를 뿌려 우리가 함께 키운 열무를 아루가 거두었다. 칼 갖다 주세요, 뒤 베란다 선반에서 김치통 좀 갖다 주세요, 내 부탁에 모두가 나서 심부름하고 거들어 주며, 파종부터 김치 담그기까지 우리 모두 함께 만든 모두의 김치라는 것을.
짜면 짠 대로,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맛있다는 칭찬 아끼지 않으며 잘 먹어주니, 부족한 솜씨로도 자꾸 해 볼 용기가 나는 것임을.

(2013년 6월 1일)

 

 

열무김치 담근 지 석 주가 지났다.

맛좋게 익은 열무김치는 요즘 최고의 인기 반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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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 식혀주는 시원한~ 열무냉면!
올해의 ‘마녀스프’ 육수에 새콤한 열무김치, 무 초절임을 넣어 먹는다. 무 초절임은 작년에 농사지은 무가 남아 올 초에 만들어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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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를 뽑아 버렸더니 애벌레들이 케일에 자리를 잡았다. 먹성이 얼마나 좋은지, 줄기만 남기고 이파리를 싹 갉아먹었다. 입맛이 까다로워서 상추, 치커리 같은 채소는 놔두고 배추와 열무, 케일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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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람이가 채집통에 모은 애벌레들이 고치를 짓더니, 네 마리 중에서 두 마리가 드디어 허물을 벗고 나왔다. 배추흰나비 애벌레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방 애벌레였다.
번데기 두 마리가 아직 남았는데 또 어떤 녀석이 나올지 궁금하다.

 

 

채집통에서 퍼덕거리는 나방을 보며, 우리는 오랜만에 에릭 칼의 ‘배고픈 애벌레’ 그림책을 꺼내 읽었다.
조그만 애벌레가 엄청난 양의 이파리를 먹어치우는 걸 지켜보고 그리고 알에서 애벌레, 번데기, 나비(나방)이 되는 과정을 경험하고 나니 책이 훨씬 재미있게 느껴졌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닥치는대로 먹어대는 애벌레의 모습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엄마, 여기 봐! 번데기 그림이 아주 비슷하지!
해람이가 채집통의 번데기와 그림 속의 번데기를 견주며 책을 들여다본다.
나 역시 나비의 한살이를 한 줄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지, 실제로 지켜본 것은 처음이다.

꿈틀거리는 애벌레가 고치 짓고 들어가 꼼짝 않다가 나방이 되어 퍼덕거리는 걸 보니, 가슴이 뭉클하다. 징그럽다고 내쫓기 바빴던 애벌레, 나방도 하나의 생명임을 깨닫는다.

머릿속 지식으로는 느낄 수 없던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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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방이 나비에 비해 예쁘지 않다는 것은 편견일 뿐!
몇 해 전 여름, 산속 집에서 처마밑 전등 끄는 것을 깜박 잊었더니 갖가지 나방이 처마밑으로 모여들었다.
나방도 충분히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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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진향
사진으로 만난 남편과 408일간 세계일주를 했다. 서로에게 올인해 인생을 두 배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둘이 넷이 되었고, 현재를 천천히 음미하며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돈 벌기 보다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아루(아름다운 하루), 해람(해맑은 사람)과 함께 자연과 사람을 만나며 분주한 세상 속을 느릿느릿 걷는다. 2012년 겨울, 49일동안 네 식구 말레이시아를 여행하고 왔다. 도시텃밭에서 농사를 짓고, 사진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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