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619_1.jpg » 한겨레 자료 사진.오늘도 저녁 약속 있어?”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도 아닌데, 아내의 문자메시지에 찔끔한다. 사실 날마다 약속이니 새로울 게 없다. 내 직업은 많은 사람들을 두루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해결방법을 고민하는 게 일이다. 만날 사람이 없어 약속 없는 날이 외려 특별한 날이다. 그런 날이 잦으면 '무능'을 자책하기도 한다. 아내도 그런 사정을 모르지 않지만, 굳이 나의 약속 유무를 매일같이 묻는다.


“응, 약속 있어.”
“누구 만나? 어디서 먹어?”


상세히 설명을 하거나, 대충 둘러대거나 어쨌든 대화는 그리 길지 않다. 어차피 나를 의심해서 뒷조사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남이 해주는 밥 먹는다니 부러운 게다. 집에서 아이 둘을 보는 아내는, 밥 한 끼 온전히 먹기도 힘들고, 차 한 잔에 수다떨 여유도 없다.


어디 밥자리 약속만 부러울까. 어쩌다 내가 회사 안팎에서 칭찬들을 일이라도 생기면, (물론 아내는 누구보다도 기뻐해주겠지만) 그건 또 얼마나 부러울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승진이 더딘 직업이라 여지껏 직급이 오른 적도 없고, 사회적으로 대단한 성과를 낸 적도 없다. 그러나 그런 일이 생기면 아내의 부러움은, 축하만큼이나 커지지 않을까 싶다.

 대학 후배인 아내는 몇해 전까지 커리어우먼으로 승승장구했다. 첫째 출산 뒤 잠깐의 경력 단절을 겪었다가 재취업에 성공했지만, 둘째 임신 뒤 다시 직장을 관두고 프리랜서로 나섰다. 하지만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출산 뒤 두 아들의 육아를 사실상 전담하면서부터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바깥에서의 회의나 약속엔 제때 참석도 못하고, 아이들이 잠든 뒤에야 노트북을 주섬주섬 펴놓고 일을 하기 일쑤였다. 여기저기서 찾는 전화가 와도 우는 아이 달래느라 못 받기 십상이었다.

자기는 동동 발구르며 그러고 있는데, 아무리 일 때문에 필요하다고는 해도, 끼니 때마다 사람들 만나 밥 먹고 차 마시고 술 마시고 웃고 떠들다 오는 내가 얼마나 야속했을까? 그 심정 십분 이해한다. 우리 부부가 아이들을 직접 우리 손으로 키우기로 하면서, 육아를 위한 누군가의 양보는 불가피하게 됐다. 이유야 뭐가 됐건, 양보한 쪽의 마음이 괜찮을 리 없다. 아내는 내가 부러울 거다.

우리 부부만의 얘기가 아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나면, 육아, 가족문제, 경제적 곤란 등 다양한 이유로 어느 순간 한쪽의 양보가 필요한 날이 온다. 멀쩡히 직장 다니던 사람에게 “당신, 일을 그만두면 어떨까?”라고 하거나, 힘겹게 집안일을 꾸리던 사람에게 “당신, 일을 하면 어떨까?”라고 갑자기 이야기를 꺼낸다. 많은 경우 부담을 지는 건 엄마다. 아빠들이 직장을 관둘 땐 자기 꿈을 좇겠다는 이유를 대며 가족에게 되레 부담을 떠안기는 경우가 많다. 여성들도 꿈을 좇아 직장을 관두는 일이 없진 않지만, 그 경우 대다수는 독신이다. 엄마들은 아빠들이 부럽고 독신들이 부럽다.

지난해 통계청 자료를 보면, 54살 이하 기혼여성 986만명 가운데, 직장을 다니지 않는 여성은 408만명이었다. 결혼·임신·출산 등 경력단절 사유 발생으로 직장을 관둔 여성이 190만명, 그중 108만명이 30대였다. 20대의 경력을 바탕으로 왕성한 사회활동을 해야 할 30대가, 남편들을 부러워하고만 있었던 셈이다.

피할 수 없는 부러움이라면, 나누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아내가 양보를 하지만, 언젠가 나도 (첫째 때처럼) 육아를 전담하며 다시 양보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땐 나도 아주 많이 부러워해주겠다. 나의 이 다짐으로, 108만명 가운데 적어도 나의 아내 하나만이라도 마음에 조금의 위안을 얻기 바란다.

** 이 글은 월간 육아잡지 <맘&앙팡>(디자인하우스) 2013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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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외현 기자
아이 둘의 아빠인 <한겨레21> 기자. 21세기 인류에게 육아는 남녀 공통의 과제라고 믿는다. 육아휴직 등으로 나름 노력해봤지만 역시 혼자 가능한 일은 아니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하나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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