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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밭에 다녀온 날, 아루는 하루종일 시무룩했다.

꽉 막힌 도로에서 차를 타고 보내는 시간이 지루해서 그런 줄 알았다. 딸기 농장에 못 가서 단단히 골이 났다고 생각했다.

기분을 풀어주려고 우스갯소리를 하고 장난도 걸어봤는데 시큰둥하기에 나도 힘이 빠졌다. 일곱 살 아이에게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묵묵히 견디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면서도 얼굴 구기고 있는 아이가 못마땅했다. 어쩔 수 없는 일에 불평하지 말자, 그러면 모두가 더 힘들어지니 얼굴 펴라고 잔소리를 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잠든 아이가 내게로 기대었다. 잠든 얼굴을 보니 안쓰럽고 짠해져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마에 닿는 순간, 따끈따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 내 이마를 짚어 보고, 좌린 이마도 짚어 보고, 그제서야 알았다. 열이 났구나! 머리 아프다는 말을 몇 번 했는데, 불평하는 소리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애가 아픈 줄도 모르고 빗속에 끌고 다니고 짜증 낸다고 나무라기까지 하다니! 한없이 미안하고 후회스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여행하는 동안 아이들이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아이가 아프면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괴로운데, 낯선 여행길에서 라면 더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살면서 내가 원치 않았던 상황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 나는 펑따오씨 이야기를 떠올린다. 펑따오씨는 남미를 여행할 때,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만난 대만 사람이다. 라디오 진행자라더니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마치 라디오를 켜 놓은 것처럼 입에서 재밌는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술술 흘러나왔다. 펑따오씨는 자신의 이집트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버스가 고장 나 멈추고, 사막 한가운데 버려지기도 하고 황당한 일을 많이 겪었는데 그러면서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눈앞의 상황이 최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다음에 더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니까 나중에는 어떤 나쁜 일을 겪어도, ‘이것이 최악은 아닐 거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나쁜 상황에서 더 나빠질 것을 생각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상대적으로 지금의 상황이 낫다고 생각하면 현실에서 긍정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극단으로 치닫는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침착하고 차분하게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다.
체온계로 열을 재보니 39도가 조금 넘었다. 최악은 아니야, 그리 나쁘지 않아, 펑따오씨 교훈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다행히 다른 증상은 없었다. 서울에서 가져온 해열제가 있지만 조금 지켜보기로 했다. 한밤중에 열이 더 오를 수 있으니 그때를 대비해서. 아이가 잠들 때까지 손발을 주물러 주고 잠이 든 후에도 계속 곁에 머물렀다. 열 때문에 발그레 상기된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말레이시아에서 지낸 일들이 한 장면 한 장면, 영화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도란도란, 낮은 목소리로 잠든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말레이시아에 와서 씩씩한 네 모습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어. 네가 어릴 때 처음 가는 낯선 놀이터에서 내 다리를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낯선 곳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라고 생각했거든. 첫날부터 낯선 풍경, 낯선 모습의 사람들 속에서 씩씩하게 걷는 네가 참 대견했어. 타만네가라의 무시무시하게 울창한 숲, 까마득히 높이 매어 놓은 흔들다리에서는 나도 무서워 다리가 후들거렸는데 오히려 성큼성큼 앞서 가는 너를 보며 용기를 내었지. 쿠알라룸푸르에서 해람이가 집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너는 여행이 좋다고 했지? 새로운 것을 많이 봐서 좋다고 했던 말을 기억해. 나도 그런 이유로 여행을 좋아해. 새로운 것에 눈뜨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이니! 우리 모두 함께 볼 수 있으니 더더욱. 나는 우리가 느릿느릿 피곤할 정도로 걷는 가운데 조금씩 다가가고 느낄 수 있기를 바라. 빠르고 간편하게 스쳐 지나가는 것보다 힘들어도 그게 더 가치 있는 여행이라고 생각한단다. 무더운 날씨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비가 오는데도 우리 함께 가 볼까? 했을 때 ‘그래!’ 라며 따라 나서줘서 고마워. 힘들어도 크게 내색하지 않고 잘 참아 주어 고맙고. 몸이 아픈 것은 무리하지 말고 쉬라는 신호야. 생각해보니 우리가 지난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너무 달려온 것 같아. 영하의 날씨에서 갑자기 삼십 도의 무더위를 경험하다가 또다시 서늘한 곳에 오니 몸이 적응 못 하는 것도 당연하지. 잘 자고 푹 쉬고 나면 금방 좋아 질거야. 열나고 아팠는데 살펴주지 못해서 미안.

아루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마음속에서 샘 솟았다. 이야기하면서 가슴이 뭉클했고 따뜻해졌고 힘이 났다. 아이가 아파서 머리맡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이, 예상치 못한 힘든 상황을 함께 이겨내는 것이 유명한 관광지에서 눈도장 찍고 인증 샷을 남기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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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멀리 나가지 않기로 했다. 주차장처럼 꽉 막힌 도로를 떠올리면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당연히 게스트하우스에도 손님이 많았는데 아침이 되자 하나 둘 집으로 혹은 관광지로 빠져나가고 조용해졌다. 아이들을 늦게까지 재우고 느지막히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주인이 허락해주어 부엌의 전기밥솥에 전날 산 옥수수와 고구마를 쪘다. 좌린이 밖에 나가 쌀국수도 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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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원대로 아루는 많이 좋아졌다. 열은 남아 있었지만, 쌀국수에 옥수수를 양껏 먹었고 표정도 밝았다.
아루랑 끝말잇기, 손가락 숫자 게임을 했는데 오늘따라 내가 계속 졌다. 아루가 4를 부르며 엄지 두 개를 치켜들면 나도 따라 두 개를 다 올리고, 2하고 부르면서 저는 손가락을 하나도 안 드는데 나 혼자 두 개 다 들어서 지기도 했다. 하하하, 엄마는 내 말을 너무 잘 듣는 것 같아. 내가 말만 하면 그대로 되잖아! 아이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얼마나 밝아지는지. 까짓것, 게임에서 지는 것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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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아기 나무야! 아기가 주렁주렁 열렸네.
게스트하우스 벽에 붙어 있는 지도를 보다가 가까운 산책로를 걸어보기로 했다.
아직 열이 있는데, 괜찮을까?
차 타고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뭐. 힘들다고 하면 내가 업어줄게.
아프다고 누워만 있는 것보다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게 좋을 것도 같다. 숲에 가면 공기가 좋으니 머리가 맑아질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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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둘을 안고 무단 횡단. 신호등이 거의 없다. 있어도 별로 의미가 없다. 늘 무단 횡단을 해야 하는데 차 방향이 우리랑 반대인데다가 차들이 보행자를 별로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길 건너기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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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터미널 뒤에서 놀이터를 발견했다.
카메론 특산물들 모형. 머리 아프다던 아이가 신발 벗어 던지고 오르기 시작.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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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따라 양배추 산에 오른 해람. 올라가긴 했는데 어떻게 내려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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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숲 속으로 들어왔다. 산책로가 잘 되어 있어서 걷기 쉽다. 큰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렇게 울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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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막 쏟아지지는 않고 보슬보슬 조금씩 계속. 비라기보다 그냥 물안개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의 숲을 mossy forest 라고 소개하는 이유를, 숲에 이끼가 많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카펫을 깔아 놓은 것처럼 바위를 뒤덮은 이끼...폭신폭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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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비 맞으며 걸으라고 하지 않을게. 약속대로 머리 아플 때마다 좌린은 계속 아기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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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폭포. 폭포 자체는 별로 멋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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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딸기가 먹고 싶어. 딸기 먹으면 머리 아픈 게 나을 것 같아.
산책로 입구로 돌아왔을 때 아루가 다시 딸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울 가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데, 굳이 여기서 비싼 돈 내고 먹어야겠니?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아픈 아이 소원이니 들어주기로.
그래, 그래도 먹자! 딸기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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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해람이는 초콜릿 바른 딸기 꼬치를 고르고...
순식간에 해치워서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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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속파 아루는 딸기를 한 팩 골랐다.
아프다고 징징대더니 금세 웃고 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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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머리가 아파쪄 딸기 먹고 고쳐야 돼.
(해람이가 두 돌 지나 말문이 막 터졌을 때 한창 하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원래 해람이 이야기는 ‘차가 쿵해쪄, 그래서 견인차가 왔쪄. 포도 먹고 딸기 먹고 고쳐야 돼.’-차가 부딪쳐서 사고가 나서 견인차가 끌고 갔어. 사람이 아플 때 약 먹고 낫는 것처럼 포도, 딸기 먹으면 낫는다는.)
딸기 약효가 50미터는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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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바닥에 떨어진 깨진 아크릴 광고판을 발견하여 글자 맞추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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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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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거 봐! 뱀 같지?

 

 

아이가 아프면
“아이들은 엄마의 기운으로 살아간다.” 는 조산원 원장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아이가 아프면 덩달아 지치고 힘들어지는데 이 말을 떠올리면서 기운을 차린다. 내 기운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지쳐 쓰러질 것 같아도 힘을 내고 내가 가졌던 용기보다 더 큰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아이들과 여행하면서 엄마 또한 아이들의 기운으로 살아감을 깨닫는다. 아픈데도 잘 견디고 잘 노는 아이가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그리고 이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들이 내 곁에 있으니 마음속에 밝은 기운이 마구 샘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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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루의 이 하나가 흔들흔들, 빠지기 직전이다.

 

애들 아프다고 애달플 거 없다. 애들이 아픈 건, 크느라고 그런 거다.
엄마 말씀이 귓가에 울리는 듯 하다.

 

 

사족

카메런 하일랜드의 딸기 맛은

한 마디로 그저그랬다.

조그맣고 달지 않았다. 요즘 우리가 먹는 딸기에 비교하면 초라하고 맹물 같지만 옛날, 어려서 먹던 노지 딸기의 맛이었다. 옛 기억이 떠올라 반가웠고, 품종 개량으로 크고 달게 만든 하우스 딸기보다 자연스럽고 건강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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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진향
사진으로 만난 남편과 408일간 세계일주를 했다. 서로에게 올인해 인생을 두 배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둘이 넷이 되었고, 현재를 천천히 음미하며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돈 벌기 보다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아루(아름다운 하루), 해람(해맑은 사람)과 함께 자연과 사람을 만나며 분주한 세상 속을 느릿느릿 걷는다. 2012년 겨울, 49일동안 네 식구 말레이시아를 여행하고 왔다. 도시텃밭에서 농사를 짓고, 사진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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