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다엘이 심한 불안을 보이기 시작했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묻는다.
“엄마, 내일 어디 안 가? 어디 가?”
내가 집에 있을 거라고 하면 안도하고, 외출한다고 하면 안절부절.
“왜 그래, 엄마 어디 갔다가도 너 오기 전에 와있잖아,.”
아무리 안심을 시켜도 그때뿐, 점점 불안이 심해졌다.

 

시에서 운영하는 상담센터에 다엘과 함께 들렀다.
거기서 다엘이 그린 가족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왼쪽에 할머니 모습이 크게 그려져 있고
오른쪽엔 책상 앞에 혼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
그 밑엔 엄마가 앉아서 휴대폰을 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를 먼저 크게 그리고
자신과 엄마 모습은 작게 그려 놓았다.

 

뒤늦게 깨달았다.
입양법 개정 문제로 글 쓰고 카톡 주고 받으며
온 정신을 집중하느라 내 자식이 어떻게 지내는지 까맣게 잊은 것이다.
밥과 숙제만 챙겨주고 그 담엔 일에 푹 빠진 엄마를 보며
얼마나 외로웠을까?
유일한 의지처인 엄마가 점점 어딘가로 사라져가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왜 이렇게 몰두하고 있는 걸까?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지금 입양법 문제는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더욱 사각지대로 몰아가는 사안이기에
긴박하게 해결해야 하는 건 맞다.
그런데 내 일상을 깨뜨리며,
자식의 안위를 돌보지 않으며 이렇게 몰두하는 건 뭘까?

 

요즘 신조어로 잔다르크 증후군이란 말이 있다고 한다.
잔다르크를 모욕하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모든 일은 자신이 앞장서야 해결된다고 믿는 심리상태를 말한단다.
나도 모르게 이 일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다.
국제협약과 논문을 읽고 청원문을 쓰면서
모든 일을 내가 해야 제대로 될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많은 입양부모들이 전문가 못지않은 팀을 꾸려
힘든 작업을 척척 진행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부모의 등 떠미는 찬사에 넋을 잃고
항상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런 1등 제일주의를 혐오해서 내 자식은 대안학교에 보내놓고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선 언제나 고단한 발버둥이 있었다.
백조가 우아하게 물 위를 떠다니기 위해
보이지 않게 발을 쉼 없이 굴러야 하는 현실처럼
나는 한 순간도 맘 놓고 쉬지 못했다.
마음 속에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자아가 계속 날 인정해달라고
울부짖고 있는 걸 생각 못했다.

 

오랜만에 다엘의 눈을 들여다보고 웃으며 얘기했다.
아이가 재미있어 하는 일에 진심을 가지고 다가가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내 안에 정말 오래 된 우울이 보였다.
‘모든 게 귀찮아, 날 가만 내버려 둬. 내 자리에 자꾸 들어오지 마….’
어린 시절 치유하지 못한 상처에 붙들린 자아는
다양한 항변을 하며 자신의 옹고집을 풀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자식을 키우면서 부모가 사람이 되는 거구나.
나의 한계가 뚜렷이 드러나면서 마음이 아팠다.

 

다엘과 함께 도서관에 가서 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들을 빌렸다.

한편으론 내가 못하는 일을 다엘의 아빠가 조금씩 채워주고 있었다.
매일 다엘과 페톡을 하면서
관계 이어가기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떤 때는 3, 40분간 전화를 붙들고
끊임없이 얘기하는 다엘과 정성껏 대화를 나누는 걸 봤다.

 

다엘이 늘 북한을 궁금해 하고 북한 군대를 알고 싶어하기에
얼마전 다엘아빠의 제안으로 통일전망대에 들렀다.
아빠의 군대 시절과 북한의 지금 상황을 들으며
다엘은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였다.

 

통일전망대2.jpg » 통일전망대에서 얘기 나누는 아빠와 다엘

 

 

내가 잠깐 화장실에 다녀 온 동안 두 사람은
통일전망대를 방문한 기념 글을 써서 화면에 띄우고 있었다.
화면에 쓰인 글귀를 보며 잠시 마음 한 구석이 저렸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걸어서 갈 수 있기를!’

 

그렇다. 마음은 멀리 있지 않으니
힘든 사람들끼리 서로 어깨를 기대고 가야지.

 

다엘과 아빠의 메시지2.jpg » 통일전망대 화면에 띄운 아빠와 다엘의 글귀.

 

 

부자 간에 성격이 참 많이 닮았다.
섬세하고 예민하고 다른 이의 감정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인간관계에 있어 둔감한 나하고는 참 많이 다르다.

 

상처 많고 나약한 나를 엄마로 택해준 다엘,
끊일 듯 이어지는 관계에도 정성을 다하는 다엘 아빠,
모두 용감한 사람들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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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딸이 뇌종양으로 숨진 후 다시 비혼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입양하여 달콤쌉싸름한 육아 중이다. 공교육 교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시민단체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의 상담원이자 웰다잉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지역의 입양가족 모임에서 우리 사회의 입양편견을 없애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초등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대안교육 현장의 진한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이메일 : juin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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