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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의 병명이 '클리펠 트리나니 증후군'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것이 10만분의 1확률로 나타나는, 치료 불가능한 병이라는 걸 알았을 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나쁜, 보이지 않는 증상들이 진행중일 수 있으며 

그 어떤 증상에 대해서도 진통제 외엔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때로는 진통제도 듣지 않을 수 있으며 심한 경우엔 다리를 절단하기도 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많은 것을 내려 놓아야 했다. 


희소질환과 함께 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시한폭탄 하나 안고 사는 것이며, 

많은 것을 내려놓고 그저 아이가 아프지만 않기를, 걸을 수만 있기를, 하고 바라게 된다.  

하지만 이 병처럼 혈관에 문제가 있는 경우엔 나이가 들어가면서 노화과정과 함께 병증이 자연스레 더 악화되기 때문에 아이가 커 갈수록 불안감도 커져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불안을 더욱 키우는 건, 10만분의 1이라는 숫자에서도 알 수 있는 '희소성' 그 자체에서 오는 공포감이다. 동네 의사들은 물론이고 대학병원 응급실 의사, 혹은 관련 전문의들 중에서도 이 병을 '아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우리는 정말 운 좋게 실제로 이 병을 알고 있던 의사를 한번에 만난 경우인데, 이런 사례는 땅 넓고 사람 많은 미국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다. 우리는 이 의사 덕분에 출생 직후부터 이 병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적절한 대처법을 배웠고, 그 후 연계된 여러 의사들로부터 정기 검진을 받고 있다. 하지만 아이 몸에 급히 문제가 생겨 이 근방 대학병원 응급실에라도 가게 되면 의사 간호사들이 줄줄이 들어와 오히려 내게서 이 병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병명이 길고 생소해서 내게 병명의 철자를 하나 하나 물어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희소/난치 질환을 겪고 있는 사람과 그의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 스스로 '전문가'가 되어간다. 미국은 특히 다양한 서포트 그룹(사별, 이혼, 가정폭력, 장애, 질병 등 어떤 어려움/질환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희소/난치 질환자들의 서포트 그룹 활동도 매우 활발하다. 우리도 아이가 태어난 직후 'KT 서포트 그룹'을 찾아 가입했고, 그곳을 통해 질환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마음의 위안을 얻으며 살고 있다. 


이 서포트 그룹은 혈관 질환에 대해 미국 내에서 가장 경험 많고 권위 있는 곳으로 알려진 한 병원의 혈관전문 의사들과 연계해 2년에 한 번 대규모 컨퍼런스를 열고 있다. 이 컨퍼런스는 관련 의사/간호사들이 나와 환자 및 그 가족들을 직접 만나 연구 자료를 공개하고 상담을 하는 자리이면서, 환자와 그 가족들이 서로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고 서로 위로하고 돕는 자리이기도 하다. 우리 아이처럼 발 크기가 달라 신발을 짝짝이로 신어야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산 신발의 나머지 한짝을 들고 나와 필요한 사람들끼리 서로 나머지 짝을 교환하는 유쾌한 행사도 연다. 또 사춘기 예민한 아이들을 둔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또래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기도 한다. 그렇게 만난 아이들은 각자 집에 돌아가서도 이메일이나 전화를 교환하면서 학교생활/친구관계의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한다. 비록 아직 학회에 참석할 만한 경제적 여건이 못 되어 이들과의 교류는 온라인으로만 가능하지만, 이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나는 이 병과 '함께' 사는 법을 일찍부터 터득하게 된 것 같다. 이 곳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겪는 통증, 증세 악화에 대해서도 가감없이 서로 의견을 나눈다. 때로는 안쓰러운 혼잣말을 내뱉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증세가 심해 중환자실에 들어간 한 멤버를 위해 다같이 기도하는 마음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서포트 그룹의 분위기는 긍정적이다. 어차피 못 고치는 병이라면, 때로 아프고 힘이 들더라도 그 병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함께 사는 수밖에 없다는 자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상황이 줄곧 마음에 걸렸다. 한국에도 이런 취지로 만들어진 '서포트 그룹' 같은 것들이 '환우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한국의 환자 및 보호자들은 각자 알아서 정보를 찾고 개인적으로 대처법을 하나하나 터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는 워낙 의사'선생님'들에 대한 의존도와 의사들의 자기 권위가 높은 사회이지 않은가. 내게 개인적으로 연락해 온 사람들 몇몇이 전한 이야기로는 수소문 끝에 찾아간 유명한 의사들이 "이건 고칠 방법 없으니 그냥 이렇게 살아요" 하거나 "이거 이제 희귀병도 아니에요. 내가 이런 환자들 많이 봤거든." 하고 환자에게 도움은 커녕 상처만 주는 발언을서슴치 않고 내뱉는다고 한다. 앞으로 어떤 증상들이 있을 수 있고, 평소에 어떻게 건강관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도 주지 않고, 정기적으로 어떤 검사를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도 않고 무심히 환자를 돌려보내는 의사들도 종종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환우회 내에서 주요하게 오가는 얘기들은 모두 치료법이나 수술, 의사/병원 추천에 대한 얘기들이고 각자의 일상생활이 어떤지, 각자 어떤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는 잘 공유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 얘기를 보면 더 우울해진다'며 환우회에 가입만 해 놓고 활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각종 희소/난치 질환 환자 및 그 가족들이 이중/삼중고를 떠안기 쉽다. 부모 중 한 사람은 각종 병원비/검사비를 대느라 허덕이며 일을 해야 하고, 한 사람은 애를 데리고 이 병원 저 병원 수소문해서 다니느라 바쁘다.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면 눈살을 찌푸리거나 딱하게 보는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그러다 보면 부모는 쉽게 절망하고 아이는 쉽게 상처받게 마련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우리 사회가 희소질환/장애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희소질환/장애아를 둔 특정 개인, 특정 가정 뿐 아니라 국가적/사회적으로 우리 모두가 각종 질환과 장애를 우리 공동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픈 사람들에 대해 배제하지도 간섭하지도 않으며 무심하지도 않은 사회였으면 좋겠다. 질환으로 인한 신체적/정신적 고통에 더해 경제적/심리적/사회적 압박감, 그리고 고립감과 공포 속에서 힘든 사람들을 보며 "내 일 아니니까" "고칠 수 없으니까" "그건 국가가 해 줘야 되는 거니까" 등의 말로 외면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하나 벌려보려고 계획 중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조금 막막하지만, 우선은 내 아이 뿐 아니라 KT를 갖고 태어난 다른 아이들도 내 아이만큼 많이 웃고 많이 사랑받으며 자랄 수 있게 돕고 싶다. 그 시작으로 우선 내가 여기서 보고 배운 지식과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고, 다른 부모들과 연대할 수 있는 온라인 공간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이왕이면 기존의 한국식 환우회와는 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접근법으로 희소질환을 바라보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국가/사회에 정당하게 요구하며 우리 아이들이 신체적/정신적으로 많이 아프지 않고 잘 자랄 수 있게 해주고 싶다. 


올 연말은, 그 일을 어떻게 구체화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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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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