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앉아 있는데 벽면 위 스피커에서 관리실 안내음성이 들려왔다. 3.1절을 맞이해 태극기를 게양하라는 안내였다. 3.1절이란 단어에 광복까지 불과 6개월의 시간을 남겨두고 감옥에서 차갑게 쓰러져 간 젊은 시인 생각이 났다. 영화 ‘동주’가 보고 싶어 영화예매를 하려다 뒤로 미뤘다. 3월 1일은 3.1절이기도 하면서도 동시에 아이 개학을 하루 앞둔 날이기도 했다. 


학창시절 국경일은 놀 계획을 짠 뒤 몸을 움직이는 날이었고, 직장인일 때엔 늦잠을 자는 날이었다. 같은 국경일이라도 내가 어떤 모습으로 있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각기 다르게 다가온다. 학부모가 되고 보니 3.1절은 아이와 문구용품점에서 새학기 준비를 해야 하는 날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1년 전. 지난해 3월 2일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한 날이었다. 그렇게 3월 2일은 학부모에겐 학교란 글자와 함께 여러 감정과 기억들을 담고 있었다. 창공을 처음 나는 어린새를 바라보는 어미새처럼, 결혼식을 하루 앞둔 신부처럼, 짝사랑한 상대와 데이트가 예정된 아침처럼, 아이의 초등학교 첫 등굣날이자 입학식은 설레면서도 두려웠다. 기다리던 시간이 처음이란 경험과 만나면 설렌 가슴은 두려움과 함께 뛴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한지 사흘째 되던 날, 옷을 챙겨입으며 아이와 함께 등교 준비를 하는데 민호가 말을 걸었다.
 “학교 혼자서 갈래.”
아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 앞에 잠시 얼어붙었다. 갑자기 왜 그럴까? 엄마가 아닌 아빠여서 함께 등교하기 싫은 건가? 먼저 든 생각은 내가 엄마가 아닌 아빠라는 사실이었다. 상담 심리학 수업을 들어보니 상대가 어떤 상태인지 판단하는 경우엔 대개 나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상대가 불안해 보이면 상대가 불안한게 아니라 내가 불안한 것이고, 상대가 편안해 보이면 상대가 편안한 게 아니라 내가 편하기 때문이다. 내 감정이나 느낌인데 상대의 감정이나 느낌이라고 착각하는 것, 이를 심리학에서 ‘투사’라고 한다.

아이에게 물어봤다. 투사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방법은 상대에게 직접 묻고 답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아이는 혼자서도 등교를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이는 자기 혼자 잘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하고 싶어했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이동하는 자동차가 떠올랐다. 학부모가 되고 보니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건 마음 속 눈높이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눈높이로 바라보면 지나가는 자전거도 단지 안의 자동차도 무척 크고 빠르게 느껴진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 아이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래.”
동의는 했지만 불안했다.

자기 몸의 절반 가까운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아이는 스스로 가고자 했고 아빠는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멀리 떨어져 학교를 향하는 민호를 바라봤다. 작은 발을 앞으로 사뿐사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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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마음에 아이를 뒤따라 가다보니 아이는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걸어나갔다. 차가 지나가는 아파트 안 좁은 도로에선 여러 번 오른쪽과 왼쪽을 둘러보았다. 학교를 30여미터 앞두고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학교 앞. 민호가 다니는 학교는 서울대공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곧 꽃으로 몸을 단장한 나무들 사이를 걸어가다가 학교 정문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메모장에 2015년 3월 4일. 아이 스스로 학교에 간 날 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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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어려움에 처하면 항상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갈팡질팡을 한다. 부모니까 도와 줄까, 아니면 지켜볼까. 그러다가 대개 멀리서 아이가 겪는 어려움을 묵묵히 바라보는 쪽을 선택한다. 첫등교든 친구들간 다툼이든 때로는 숙제이든. 그 때마다 아이를 바라볼 때마다 아이가 두발 자전거를 처음 타기 시작했던 때를 떠올렸다. 민호가 두발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한 날, 난 민호 뒤에서 안절부절이었다. 잡고 있던 손을 언제 놓아줘야 하는지, 어디까지 아이 자전거 속도에 맞춰 달려가야 하는지 고민이었다.


분명한 건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넘어져야만 탄다. 넘어지지 않고 탈 수 있는 자전거는 없다. 넘어진 아픔이 클수록 중심을 잡고 타는 자전거의 기쁨도 컸다. 그래도 아이가 자전거에서 넘어질 때면 가슴은 아플 수밖에 없지만 그건 아이가 겪고 이겨내야 할 시련이었다. 자전거 패달을 부모가 대신 밟아줄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혼자서 자전거를 타는 걸 몸으로 깨달은 날, 아이는 자신이 보고 싶은 풍경을 따라 가고, 그 풍경 앞에서 자신의 얼굴과 마주할 수 있었다. 넘어진 아픔만큼 달리는 기쁨을 느끼기를 바랐다.


서정윤 시인은 시작 활동의 어려움을 “그 누구에게도 구원의 손길은 오지 않았고, 결국 스스로 조금씩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고 한 것처럼, 아이의 시련을 이겨나가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아이임을 가슴 아프게 기억했다.

 

부모 가슴이 아프다고 아이가 스스로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시련’이란 기회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하며 2학년 새학기를 준비했다. 부모의 아픔은 아이의 감정과 대분 다른 투사의 감정이라는 사실도 기억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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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만들고 다듬느라 35년을 흘려보냈다. 아내와 사별하고 나니 수식어에 가려진 내 이름이 보였다.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고 기자 생활을 접고 아이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왔다. 일 때문에 미뤄둔 사랑의 의미도 찾고 싶었다. 경험만으로는 그 의미를 찾을 자신이 없어 마흔에 상담심리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지은 책으로는 '지금 꼭 안아줄 것'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물었다'가 있다.
이메일 : areopag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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