졌다. 부자 시리즈 6차전. 오늘은 정말 이기고 싶었는데... 

개미오줌 만큼도 봐주지 않았는데 또 졌다.


토요일 달콤한 늦잠도 포기하고 아침 8시에 일어나 나갔다. 

사실 지난주 5차전이 열렸던 구장은 아파트 지상 P층 보조 경기장이었다. 

‘잠실구장’에 견줄 만한 지하1층 너른 공터에서 새로운 부자팀이 야구경기를 하고 있었기에 ‘목동구장’에서 경기를 치를 수밖에 없었던 것. 

부지런을 떨었기에, 배수구 뚜껑이 1,2,3루를 완벽히 대신하고 어떤 건물의 방해도 없이 탁 트인 이 경기장을 다시 점유할 수 있었다. 

화끈한 타격전이 될 게 분명했다.


1회초 마운드에 섰다. 

몸이 풀리기 전 초반에 대거 실점했던 5차전을 교훈삼아 첫 이닝부터 전력투구 했다. 

무실점으로 이닝을 틀어막았다. 산뜻한 출발이었다. 

반면 녀석은 1회부터 흔들렸다. 

제구가 되지 않았고 불리한 볼카운트에 몰려 안타를 맞거나 볼넷을 내줬다. 

1회말 6실점 6-0. 6차전의 승운은 일찌감치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1.jpg


2회부터 녀석은 안정을 찾았다. 

볼넷으로 주자를 내보냈지만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으로 잔루 처리했다. 

5회말까지 1점밖에 내주지 않았다. 나도 나름 선방했지만 녀석은 야금야금 따라왔다. 

5회말까지 7-5, 불안한 리드였다.


이제 아웃카운트 3개만을 남겨둔 6회초. 승리를 눈앞에 둔 시점. 

그런데 내 체력이 바닥나면서 제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2스트라이크 이후에 몸쪽 공으로 헛스윙을 유도하는 승부구를 던졌지만 번번이 '몸에 맞는 공'이 나왔다. 

녀석은 다시 1점을 추가했고 1사 만루 상황을 연출하며 턱밑까지 추격했다. 

2-3 풀카운트에서 난 데드볼이 나올까봐 몸쪽 공으로 승부하지 못했고 녀석은 바깥쪽 공을 영리하게 커트해냈다. 한 7구 정도 던졌을까...

팽팽한 신경전 끝에 결국 녀석이 안타를 만들어내면서 순식간에 경기를 뒤집었다. 

녀석의 방망이는 그때부터 점수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6회초 대거 8득점, 

13-7로 전세가 뒤집혔다. 뒤늦게 터진 빅이닝이었다.


2.jpg


나의 마지막 공격. 이렇게 물러설 순 없었다. 

녀석을 상대로 볼넷 3개를 골라내고 3루타를 작렬시키며 3득점. 13-10으로 다시 추격에 나섰다. 

이제 주자는 1, 3루. 

녀석이 다시 힘을 냈다. 초구는 파울. 2번째 공은 스트라이크. 3번째 공은 볼. 

2스트라이크 1볼, 4구째. 몸쪽으로 공이 들어왔고 난 방망이를 힘차게 돌렸는데 어라? 

공은 내 방망이를 무심하게도 외면하고 지나가버렸다.  

분명 스트라이크였는데 난 헛손질... 

경기는 이렇게 아들의 대역전승으로 끝났다. 

녀석은 하늘에 대고 손을 찌르며 환호했다.(롯데 최준석의 홈런 세리머니란다 ㅜㅜ) 

어김 없이 또 승리의 노래가 울려퍼진다.


3.jpg


"13대10. 13대10. 아빠를 마지막에 몸쪽공으로 삼진을 잡았다네." 

"야, 마지막 스트라이크를 아빠가 왜 못 친 거지?"

"아니야, 아빠. 몸쪽 낮은 공이었어."


어쨌든 난 졌다. 피가 마르는 접전이었다. 


TV로 야구경기를 보면 제자리에서 별로 움직이지도 않고 공만 던지는 투수가 

어찌하여 그렇게 비오듯 땀을 흘리나 의아했는데, 해보니까 알겠다. 

투수는 '강속구? 아니면 타이밍을 뺏는 변화구?' '스트라이크인지 유인구인지' '높은 공? 아님 낮은 공' 등등의 수많은 번민과 고뇌 속에 던질 공을 조합한다. 

타자의 머릿속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스트라이크일까, 2볼인데 하나 기다릴까, 이번에 노릴까, 빠른 공이 들어오면 커트를 해야겠지'  

고비 때마다 녀석과 나는 서로 타임을 요청하며 쉼호흡을 해야 했다.


2-3 풀카운트에서 마주선 우리는, 누가 보면 웃겠지만 정말 진지하다. 장난이 아니다. 

경기 속에서 우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스포츠 정신을 배운다. 

그렇게 커가는 녀석을 나는 이제 이기기 힘들 것 같다.


* 5월16일 제 블로그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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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기자
서른두살 차이 나는 아들과 마지못해 놀아‘주다가’ 이제는 함께 잘 놀고 있는 한겨레 미디어 전략 담당 기자.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친구 같지만 권위 있는 아빠가 되는 게 꿈이다. 3년 간의 외출을 끝내고 다시 베이비트리로 돌아왔다.
이메일 :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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