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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밭에서 나온 지렁이를 만지는 윤정)  



추운 겨울에 이사와서 힘들게 지내는 동안은 나는 새 집의 주인이 우리 가족인 줄 알았다.

오우! 완전한 착각이었다.

꽃 피는 봄이 되자 집안 여기 저기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벌레들이란... 본래부터 이 집에서

살고 있었음을 강력히 주장하는 그들의 출현 앞에 나는 그저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목조 창틀이 둘러 싸고 있는, 산과 붙어 있는 오래된 이 단독주택은 그야말로 벌레 천지다.

개미들도 종류가 어찌나 많은지, 눈에 잘 안보이는 작은 놈들부터 1센티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큰 개미까지 곳곳에 나타나고 있고, 바닥을 기어다니는 땅 거미들도 수시로 출몰한다.

가끔 침대 언저리에 폴짝거리는 귀뚜라미도 있고, 공벌레가 천천히 방 바닥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날 제일 놀래키는 돈벌레는 정말로 많다. 목욕탕에 특히 자주 나타나서 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이름을 아는 것이 이 정도일 뿐, 그 외에 이름 모를 벌레들은 셀 수도 없다.

날 벌레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집 안에 벌레가 이 정도면 집 밖은 그야말로 벌레들의 세상이다.

토종 참 개구리도 뛰어 다니고, 도감에서만 본 듯한 희귀한 나비들도 너울 너울 날아 다닌다.

텃밭에서 풀을 뽑다 보면 흙 한 자밤 속에 얼마나 많은 벌레들이 우글거리는지, 처음엔

깜짝 깜짝 놀라곤 했는데 자주 보니 익숙해져서 요즘엔 나보다 그것들이 더 놀라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다.

오래 사람이 살지 않던 집이라 그동안 벌레들은 마음껏 이 터전들을 누벼왔던 모양이다.

그만큼 땅이 건강하다는 증거라서 이젠 벌레들의 출현이 고맙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렸을 땐 나도 시골에서 살아서 벌레를 만지고, 벌레와 노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었다.

땅강아지를 뒤집어서 배를 만지면 얼마나 보드라운 느낌이 나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렇지만 도시로 이사와서 아파트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벌레와 멀어졌다.

일상에서 자주 보지 못하게 되면서부터 내게도 벌레란 징그럽고, 무섭고,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어쩌다 일하던 사무실에 나방 한마리만 들어와도 펄쩍 뛰곤 했다.

결혼해서 새 아파트에 살고부터는 더 했다.

아파트는 벌레와 공존할 수 없는 공간이다.

정기적으로 소독을 해서 벌레가 아예 발 붙일 수 없게 한다.

그 깨끗하고 현대적인 공간에서 문득 벌레와 마딱뜨리면 그 공포감과 혐오감은 대단히 크다.

방 구석에 귀꾸라미가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 없앴을 것이다.

벌레란 아파트 정원이나 놀이터에서 혹 만날 수 있을까, 집안에는 없어야 했다.

어쩌다 창문으로 날벌레 한 마리라도 들어오면 잡기 전까지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었다.

그게 벌레와 내 관계였다.



그러다가 마당 넓은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왔더니 무엇보다 벌레와 빨리 친해져야 하는 일상이었다.

집안에 벌레가 나타나는 것은 아무렇지 않은 일이고, 아이들은 늘 어디선가 벌레와 만나고 있었다.

집 안에도, 마당에도, 밭에도 어디나 벌레가 우글거리는 환경에서 아이들은 쉽게 벌레와 친해졌다.

정말 그렇다.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대하게 되면 혐오와 공포감 없이 그 대상을 만나게 된다.

필규도 윤정이도 벌레를 아무렇지 않게 만지고 가지고 논다. 이룸이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비 온 다음날이면 사방에서 만나게 되는 민달팽이와 지렁이는 아이들에겐 재미난 장난감이다.

물론 만지긴 하지만 죽이거나 괴롭히지는 않는다. 혐오와 공포가 없기 때문이다.

벌레들이랑 같이 산다는 것을 아이들은 잘 안다. 벌레들이 살아야 땅도 건강하고, 우리도

건강할 수 있다는 걸 아이들은 이해한다.

윤정이는 특히 꿈틀거리는 애벌레류를 좋아한다. 갑충들도 좋아한다.

나는 아이들만큼 스스럼없이 벌레들에게 손을 내밀진 못하지만 이제 내게도 벌레는 더 이상

징그럽거나 혐오스런 존재들이 아니다. 텃밭을 일구다보면 사방에서 나타나는 살찐 지렁이들이

고맙고 이쁘다.



하루종일 자연 상태의 흙을 밟아볼 일 없이 자라나는 도시의 아이들은 벌레처럼 작은 생명들에

대한 감수성을 갖기 어렵다. 온통 인공적인 환경에서 자연과 분리되어 자라다보면 느닷없이

마주치는 작은 벌레 한 마리에도 놀라고 겁나기 쉽다.

아이들은 부모를 통해 어떤 대상에 대한 첫 감정을 갖는다. 벌레들을 어떻게 느끼는가도 그렇다.

아무 선입견없이 벌레를 향해 손을 내미는 어린아이에게 '어머, 징그러라, 만지지마!' 소리쳐

버리면 그 다음부터 아이에게 벌레란 징그러운 존재가 되 버린다.

작은 생명에 대한 경이와 애정을 갖지 못하고 자라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생명에 대한 이해는

지극히 작은 것들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에서부터 자라기 때문이다.



현충일날 아이들과 감자밭의 풀을 매다가 많은 벌레들과 만났다.

윤정이는 지렁이를 잡고 놀다가 축축한 퇴비 위에 놔 주었다. 바퀴벌레처럼 생긴 작은 갑충에게는

'거북벌레'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름모를 애벌레를 발견하고는 나방이 될까, 나비가 될까

궁굼해 하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벌레는 신기하고, 귀엽고, 소중한 친구다.

아주 작은 생명들로부터 이어지는 건강한 연결이 사람을 잘 살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우리는 이 집에서 살다가 언젠가는 떠나겠지만, 벌레들은 언제까지나 이 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이 집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벌레다. 사람이 손님이다.

자연이 주인이고 인간이 손님인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이 마음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벌레와 흙과 더불어 사는 어린 시절이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아이들에게 심어줄 것이다.

이 집에 온 보람 중에 이보다 더 큰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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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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