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 반응 테스터로 뉴스데스크에 출연한 이후 15년만의 일이다. 

‘육아하는 아빠’의 입장에서 ‘직장생활하는 엄마’와 맞짱토론을 해달라는 한 케이블방송사의 

부름을 받았다. 


“아버님, 요즘 유행하는 토크 배틀이라구요? 강심장처럼 하시면 되요”. 

방송작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프로그램을 들먹이고는 참석자가 무려 20명이란다. 


‘육아대디 10명과 워킹맘 10명이 나와 펼치는 토크 배틀’이라. 

아무렴 어때? 출연료만 많이 준다면..


“아이도 봐야하고 일도 해야 해서 **만원 이하면 안갑니다. 여기 제주인거 아시죠?”하며 

깐깐한 척을 굴었으나 거듭되는 전화 인터뷰와 서면질의 응답으로 마음은 이미 출연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대본이 나온 날, 살펴보니 대사가 꽤 많다. 

거기다 10명의 아빠 중 비중 있게 소개되고 베이비트리에 올린 기사를 패널이 읽어준다고 하니 기분까지 좋다.


전날 밤 방송작가가 최종점검을 하자는데 그 방법이 참 묘하다. 

‘아빠의 두 얼굴’에 소개된 영상(http://www.youtube.com/watch?v=kTmCaeGtQAA)처럼 

완벽하게 ‘빙의’된 채로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혼자 ‘주세요 주세요-보리출판사의 세밀화 동화책 제목’를 100번은 읽었을 것이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밝기는 밝았는데 밤새 잠을 한숨도 못 잤다. 

대본은 자신있는데 연기는 어쩌지 하며 아내가 노래자랑 출연 때 사준 핑크빛 상의를 입고 집을 

나선다. 


아침밥도 안 먹고 오전 11시 서울 가양동 녹화 세트장 도착. 

외부출연자용 컨테이너박스에 들어서니 역시나 시커먼 남자들이 서너명 기다리고 있다. 

책을 3권이나 낸 살림꾼 아저씨, 유명 아나운서 남편분, 뱃속 아이를 포함해서 아이가 모두 4명인 육아대디, 출산휴가를 받은 회사원까지 다양하게 모였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집에서 살림이나 육아를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방송이나 언론에 다수 출연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많은 아빠들 중 대사분량이 많은게 은근이 뿌듯하다. 

부끄럽긴 하지만 (양해를 구하고) 자랑이라도 하듯 ‘빙의’동화책 읽기를 연습했다.



__ 1.JPG

<정말 잘나가는 워킹맘들, 그녀들도 집안일로, 육아로 얼마나 힘이 들까?>


오후 1시가 다되어서야 손에 땀을 쥐는 녹화가 시작되었다. 

맞은 편에 앉아있는 10명의 워킹맘을 보니 모두 ‘*억 매출, *억 연봉, 투잡’의 전문가들인데 

우리 편에 앉아있는 아빠들은 수염이나 제대로 깎고 왔나 싶을 정도로 꼬질꼬질한데다 

아이 넷의 아빠는 체육복차림이다.


‘조회수 8000건을 자랑하는 파워블로거 뽀뇨아빠’(작가가 이렇게 붙여줬다 ^^;)라는 타이틀로 

소개된 후 자기소개가 이어지는데 내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지도 모르게 끝이 났다. 

‘대본대로면 다음은 이거겠지?’라고 다음 이야기꺼리를 머릿속으로 되뇌이고 있는데 

웬걸, 진행을 돕는 연예인 패널들이 대본을 씹어 먹었는지 토론방향이 산으로 가고 있다.



대기실에서 조용하던 아빠들이 너도나도 갑자기 손을 들고 대본에도 없는 본인의 이야기들을

시작하는데 이건 도무지 어느 이야기에서 끼어들어야 할지, 아니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 동안 4시간이 흘렀다. 


처음에 자기소개 말고 내가 한 이야기가 몇 분이지? 아니 몇 초던가?


심지어는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와 아이와 살림까지 돌봐야 한다는 경쟁자(워킹맘)의 

하소연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 진다. 

핑크벤츠를 회사의 격려상품으로 받았다는 한 워킹맘은 아이와 하루에 얼마나 놀아주냐는 

‘남자 패널’의 질문에 ‘일하고 돌아와 매일 30분은 아이를 꼭 안아준다. 아이와 함께 하는 물리적인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이라도 아이와의 교감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어른이 된 아이를 안아주며 노래를 불러준다는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라는 동화책이 생각나 

가슴이 찡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부와 지위를 가진 워킹맘들인데 집에 오면 편히 쉬지도 못한다는 이야기에, 

‘살림이나 육아’에 일가견이 있다는 아빠들도 어쩔 수 없는지 객석 판정단은 맘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이 보다가 스튜디오에 나온 아빠들에게 동정표로 ‘에스테틱 체험권’이 돌아가긴 했지만.


결국 나의 ‘빙의 동화책 읽기’는 녹화시간이 늘어져 한줄도 읽지 못했다. 

출연자로 나온 건지 관객으로 나온 건지 헷갈릴 정도로 고개만 끄덕였지만 

오늘 녹화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육아대디, 살림하는 남편만큼 

아내의 사회생활을 잘 이해해줄 수 있고 어려움을 공감해줄 수 있는 남편이 없다는 거’. 


그리고 더 이상 ‘육아나 살림은 엄마, 경제활동은 아빠’처럼 구분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거, 

아이는 누구차지도 아니고 엄마아빠 둘이 함께 키우는 것’.


(방송에서 할려고 했는데 못하고, 결국 베이비트리 지면을 빌린다. 고맙다)

*이번주 뽀뇨 동영상은 한 주 쉽니다. 



 __ 2.JPG  

<파워블로거도 아닌데 "베이비트리"덕분에 방송에도 출연하게 되었다. 같이 출연하신 워킹맘 중

'방배동 투잡맘'님이 블로그글을 보셨다고 해서 기분이 또 업 ^^;> 


__ 3.JPG


<방송을 마치고 아빠들과.. 오늘 토론에 지긴 했지만 아이 사랑하는 마음은 엄마 못지 않다. 

근데 이 아저씨들 정말 말 잘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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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욱
세 가지 꿈 중 하나를 이루기 위해 아내를 설득, 제주에 이주한 뽀뇨아빠. 경상도 남자와 전라도 여자가 만든 작품인 뽀뇨, 하나와 알콩달콩 살면서 언젠가 가족끼리 세계여행을 하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현재 제주의 농촌 마을에서 '무릉외갓집'을 운영하며 저서로 '제주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 '제주, 살아보니 어때?'를 출간했다.
이메일 : pporco25@naver.com       트위터 : pponyo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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