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모성애를 강조하는 나라에서

일하며 아이 키우는 엄마는 행복할 수 있을까


"들리죠? 이게 바로 생명의 소리예요.” 아직 사람의 형체도 아닌 무언가가 힘차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보통 임신 6주부터 들린다는 심장박동이 들리지 않아 마음을 졸이던 참이었다. 여름이(태명)는 거의 8주가 다 돼서야 심장 소리를 들려주었다. 내 아이의 실체를 처음 실감한 그 순간, 눈물까지는 아니었지만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껏 내가 스스로를 정의하는 방식은 기자라는 직업,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라는 지극히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였다. 그런데 그 순간은 뭐랄까, 존재의 흔적을 남겨야 할 의무를 지닌 한 생명체로서의 나 자신과 맞닥뜨리는 느낌이었다. 말로는 설명이 잘 되지 않는 이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6001598710_20150914.JPG » 영화 <해피 이벤트>의 한 장면. 주인공은 임신 사실을 안 뒤 기뻐할 때만 하더라도 어떤 신고의 나날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다. 마운틴픽처스 제공


임신 사실을 알고 ‘어떡하지’를 연발했던 나였지만 태아의 심장박동 소리가 늦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예상치 못한 절망감이 몰려왔다. 처음으로 내 몸에 깃든 생명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유산 방지 주사를 맞고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보냈던 얼마간의 시간 동안 나는 생각을 곱씹었다. 사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이를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랬다. 치솟는 전셋값, 빠듯한 생활비,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힘든 보육 환경, 희생적 모성애를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만 아니라면 아이를 낳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아이로 인해 나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 환경만 아니라면 말이다.


책 <프랑스 아이처럼>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프랑스 잡지) 화보 속 파일라(프랑스 여배우)는 유모차를 밀면서 동시에 먼 곳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 …기사에선 파일라를 프랑스의 이상적인 어머니상으로 묘사한다. …그들은 헌신적인 엄마지만, 동시에 아이와 독립적으로 죄책감 없이 자유의 순간을 즐기고자 한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런 기사를 보도했더라면? 악플이 수만 개는 달렸을 것이다.


유난히 모성애를 강조하지만 아이 키우기는 어느 나라보다 어려운 이곳에서 나는 본격적인 육아 전쟁에 뛰어들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어린이집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는 일이었다. 이름은 태명으로, 생년월일은 출산예정일로 적었다.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직을 하기 위해서는 출산 뒤 1년 안에 어린이집에 보내야 했다. 절망스럽게도 80명 정원의 구립 어린이집 대기자 수는 1천 명에 육박했다. 그다음으로 한 일은 태아보험 가입이었다. 만에 하나 아이의 몸에 이상이 있을 경우 고액의 병원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애초 설계된 보험료가 너무 비싸 절반 가격으로 낮췄을 때는 왠지 모를 죄책감이 느껴졌다. 보험료 수치가 모성애의 수치를 나타내는 것만 같았다.


고민은 끝없이 이어졌다. 복직 시기가 닥쳐왔을 때 어린이집을 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린이집이 끝난 뒤 퇴근할 때까지 아이는 누가 봐주나. 아이 돌보미 비용을 월급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아이가 큰 병에 걸리면 직장을 그만두고 간호해야 하는 걸까. 아이로 인한 행복을 제대로 느껴보기도 전에 피로감부터 몰려왔다. 이 모든 고민을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느낀 감정 하나로 이겨내기는 쉽지 않았다. 문득문득 내가 이 아이를 갖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괴로웠다. 아이를 낳기까지 39주. 기쁨과 설렘, 근심과 걱정이 마구 뒤섞인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이 글은 한겨레21 제1078호(2015.09.09)에 실린 글입니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태그
첨부
송채경화
결혼 안 한다고 큰 소리치다가 서른넷에 결혼했다. 아이를 안 낳겠다고 떠들다가 결혼한지 1년 만에 아이가 생겼다. ‘평생 자유롭게 살겠다’던 20대의 꿈은 잠시 접어두고 하루하루 모성애를 탐구하며 보내는 서른 여섯 초보 엄마. 2008년 <한겨레>에 입사해 사회부, 정치부를 거쳐 <한겨레21> 정치팀에서 일하다 현재 육아휴직중이다.
이메일 : khsong@hani.co.kr      

최신글

엮인글 :
http://babytree.hani.co.kr/410077/79d/trackback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sort
133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엄마,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요!' imagefile [11] 신순화 2012-04-03 120227
132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육아카툰33편] 왜 이제야 나타난거야? 베이비트리 앱 imagefile [1] 지호엄마 2014-02-20 109800
131 [김연희의 태평육아] 노브라 외출, 사회도 나도 준비가 안됐다 imagefile 김연희 2011-08-19 108197
130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육아카툰28편] 추석 연휴, 엄마와의 힐링 여행 imagefile [20] 지호엄마 2013-09-25 102988
129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육아카툰19편] 엄마의 선택, 아~ 발도르프여! imagefile [10] 지호엄마 2012-12-27 92815
128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육아카툰25편] 엄만 김혜수가 아니여~ imagefile [6] 지호엄마 2013-05-31 92597
127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육아카툰24편] 공주와 왕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 imagefile [4] 지호엄마 2013-05-03 91856
126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육아카툰22편] 결국~~~다 가버렸네~ㅠ.ㅠ imagefile [3] 지호엄마 2013-03-15 90617
125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육아카툰23편] 엄마! 북한이 뭐야? imagefile [4] 지호엄마 2013-04-17 87380
124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12편] 누가 감히 내 아들한테 소릴 질러!!! imagefile [8] 지호엄마 2012-06-26 86866
123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15편] 아~추석 명절에 변신 로봇이 된 까닭은 imagefile [3] 지호엄마 2012-09-28 85179
122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13편] 지호엄마, 한국 축구가 얄밉다~ 쳇! imagefile [6] 지호엄마 2012-08-13 84852
121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17편] 뒤늦은 가을 소풍, 악어야! 입이라도 쩍 벌려줄래? 플리즈~ ㅠ..ㅠ imagefile [3] 지호엄마 2012-11-29 81892
120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18편] 이 아줌마가 내년 대통령께 바라는 점~ imagefile [3] 지호엄마 2012-12-17 81323
119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10편] 어버이날 선물~ 잉잉~ 아들 낳은게 죄인가요? imagefile [10] 지호엄마 2012-05-09 80306
118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16편] 쌀쌀한 가을 날씨엔 뿌리채소로 유아반찬을~ imagefile [11] 지호엄마 2012-11-01 80303
117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11편] 솔로몬, 네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렷다~ imagefile [14] 지호엄마 2012-05-17 77857
116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육아카툰27편] 고무장갑 속에 핀 꽃, 어쩐지 똥이 잘 뭉쳐지지 않더라~ imagefile [3] 지호엄마 2013-07-16 75734
115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전업육아 다이어리를 열며 imagefile [8] 홍창욱 2011-10-12 75596
114 [즐거운아줌마의 육아카툰] [8편] 4.11 총선, 누굴 거지 새낀 줄 아시나요~? imagefile [17] 지호엄마 2012-04-06 75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