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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9년간 세 아이 낳아 기르면서 남편과 제일 많이 싸운 일은 ‘낮잠’ 때문 이었다.

주중에 회사일로 고단한 남편은 주말이면 꼭 낮잠을 자려 했다.

아이가 없을 때야, 혹은 아이가 하나일 때야 그러려니 했지만 아이가 둘이 되고, 셋이 된 후에는

남편의  낮잠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주중에 바쁜 아빠와 놀 시간이 없는 아이들은 주말이 되면 당연히 아빠를 찾고 매달리게 되는데

남편은 느즈막히 일어나 밥을 먹으면 나면 또 어딘가에서 슬며시 몸을 기대어 한 숨 더 잘 준비를

하는 것이다. ‘얼마나 피곤할까?...’ 싶다가도 남편이 낮잠을 자는 동안 내게만 달려드는 세 아이를

감당하며 집안일까지 하다보면 주중에 피곤한 게 저뿐인가, 나도 육아와 살림에 늘 고단한데...

주말이라고 낮잠 한 번 자본 적이 없었던 내 일상에 억울한 마음이 들어 화가 나곤 했다.



정말 그랬다. 분유를 먹이는 엄마들은 남편에게 애를 맡기고 미용실에도 다녀오고, 영화도 보며 기분 전환도

한다는데 세 아이 다 엄마젖으로 키운 나는 젖을 뗄 떼까지는 단 한 번도 맘 놓고 외출 할 수

없었다. 남편은 주말이라도 있지만 애 키우는 일에는 주말이고, 조퇴고, 휴가가 있을 수 없으니

1년 365일, 24시간 근무하는 기분이 든다. 오히려 주말에는 큰 아이가 학교도 안 가고 남편도

집에 있으니 밥도 더 많이 해야 하고, 반찬도 신경써야 해서 내가 할 일은 더 늘어난다. 그런데 왜 남편만 꼬박꼬박

주말이면 낮잠을 자는가 말이다.

“그럼 당신도 낮잠 자라!”고 남편은 쉽게 말하지만, 내가 누울라치면 바로 매달리는 막내부터

갖가지 것을 요구해대는 두 아이들을 성화를 남편은 잘 감당하지 못한다. 결국은 내 손으로 해결해야

하니 편하게 누울 수도 없다.



그렇지만 지난 일요일엔 정말 몸이 고단했다.

전날 우리집에서 친정 엄마 생신을 치르고 이런저런 정리며 청소도 바쁜 와중에 써야 할 글도

밀려 있어서 이래 저래 무리를 했었다. 일요일이 되니 어찌나 몸이 퍼지는지 한숨만 자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남편은 오전 내내 안방에서 낮잠을 잤고, 그동안 나는 세아이랑 놀아주고 간식 챙겨주고 집안일

하느라 몸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점심 무렵에 남편이 일어났길래 “라면 끓여 달라”는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소파에 누웠더니 몸이 천근 만근, 한 번 퍼진 몸은 옴쭉달쭉 하기도 힘들었다.

남편이 라면을 끓여 아이들 점심을 챙겨주는 소리도 들어가며, 상 치우고  설거지 하는

소리도 들어가며 잠과 현실 사이를 오락가락 하고 있는데 점심밥 먹고 큰 아이 방으로 몰려 가

함께 노는 것 같던 아이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른다.

“이룸이가 잉크병을 쏟았어요. 난리가 났다구요. 빨리 와 보세요” 어쩌고 저쩌고 하는 소리가 잠결에

들려 온다. 남편이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있는데

“엄마 깨워서 치워달라고 그래” 하는 남편 목소리가 들린다.

자기가 달려가서 치우면 되지, 모처럼 낮잠 자고 있는 나를 깨우라니 기가 막혔다.

소리는 다 들려도 몸은 혼곤하게 소파에 달라붙어버린 것처럼 일으켜지지가 않았다. 남편이 어서

달려가겠지 했는데 남편은 주방에서 설거지만 계속할 뿐 움직이지를 않는다.

할 수 없이 억지로 몸을 일으켜 큰 애 방에 가보니, 정말 기막힌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방 바닥엔 남편이 만년필에 넣는 푸른색 잉크가 온통 쏟아져 있었고 이룸이는 그 한가운데에서

손과 발이며 옷이 잉크 범벅이 되어 앉아 있었다. 필규와 윤정이는 티슈를 가져다가 잉크를

닦는다고 문지르고 있었는데 오히려 잉크 얼룩을 온 방으로 넓혀 놓고 있었다. 두 아이의 옷과

손도 잉크투성이였다.

요즘 해리포터 시리즈에 빠져 있는 큰 아이가 책 속의 주인공들이 사용하는 깃펜을 궁금해 하다가

마당에 떨어져 있는 까치 깃털을 하나 주워와서 아빠의 잉크병으로 깃펜 흉내를 내다가 일으킨

사단이었다.

나는 꽥 소리를 지르며 바로 막내를 들어올려 목욕탕으로 데려가 씻기기 시작했다. 비누로 아무리

문질러도 잉크는 지워지지 않았다. 갑자기 달려들어 옷을 벗기고 박박 세게 씻기기 시작하니 이룸이는

울고 불고 몸부림을 쳤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룸이를 대충 씻겨 옷을 갈아 입혀 놓고

주방으로 갔다.

“애들이 이 지경을 하고 있는데 여길 먼저 달려와봐야지, 설거지만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일이 있잖아!” 화가 나서 소리를 쳤다.

남편은 설거지를 하다 말고 고무장갑을 집어 던졌다.

“내가 맨날 낮잠 자는 것도 아니고 몸이 너무 힘들어서 잠깐 누웠는데, 겨우 한시간이나 잤나?

내가 자고 있으면 당신이 애들한테 우선 달려가야지. 어떻게 꼼짝도 않고 그릇만 닦고 있으면서

나를 깨워서 치우게 하라고 해!” 화나고 속상해서 하소연을 하는데

남편은 굳은 얼굴로 현관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흥, 화나면 나가면 그만이지. 뒷 감당은 나 몰라라구만. 나도 그렇게 당신한테 뒷정리 다 맡기고

성질이나 버럭 내고 나가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고!!’

속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사과도, 설명도 없이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리는 남편이 더 미웠다.



바닦 닦아내고, 애들 옷 갈아 입히고 치우는데 정신이 쏙 빠질 만큼 힘들었다.



정말 어쩌다 낮잠 한 번 잔건데, 그나마도 애들이 신경쓰여 깊이 잠도 못 들고 자다 깨다 하며

누워 있었는데, 고작 한 시간 누워 있었다고 집이 이 지경이 되나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다.

남편은 오후가 깊도록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뭐하나 했더니 꽃샘 바람 부는 밖에서

삽을 들고 아래 밭을 파헤치고 있다.

자기도 마누라 누워 있는 동안 세 아이랑 씨름하며 점심 챙겨 먹이고 설거지 하느라 고생하고

있었는데, 하던 거 다 마치려고 애들 들여다보지 못한건데, 노력하고 애쓴 것은 알아주지도 않고

마치 아이들 혼내는 것처럼 야단을 쳐대니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났을 것이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당장 달려가지 않은 것은 정말 잘못한 일이다.

남편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도 잠들 때까지 내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늘 막내 젖만 떼면 자기에게 애들 맡기고 얼마든지 나가라고 큰 소리 치지만

내가 일 하고 자기가 살림하면 더 잘할 거라고 자신있어 하지만 고작 마누라가 한 시간

낮잠 자는 동안에도 집이 이 지경이 되는 걸 보라지. 한 나절 집을 비우라고? 어림도 없지.

나도 오랫동안 분이 안 풀려서 속으로 씩씩거리다가 한편으론 기운이 쏙 빠졌다.

역시 내가 있어야 집안이 제대로 돌아가지. 다들 나 없으면 꼼짝도 못할 거면서...

에고... 어쩔거나. 주말에도 낮잠은 포기하고 내가 챙겨야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당신도 애쓴 것 아는데 여보야...

당신이 쉬고 싶을 때 나 역시 그렇다는 걸 좀 알아주라.

내 눈치 보며 조금이라도 더 자보려고 애쓰지 말고, 나도 좀 쉬고 낮잠도 잘 수 있게 배려해 줘야지.

마누라가 편해야 집안이 편하다는 것...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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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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