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 살다가 넓은 텃밭이 딸린 언덕 위의 2층집을 얻어 이사하게 되었을 때는 정말
세상을 다 얻은 듯 감격하고 기뻤었다.
한 겨울에 덜컥 이사해 놓고 혹독하게 추웠던 겨울을 나는 일에 모든 정신과 체력을 다 쏟고 나니
계절은 어느새 봄으로 바뀌었고 눈으로 덮여 있던 넓은 땅들은 모두 무언가를 심어야 하는
밭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마당도 고마운데 텃밭까지 딸린 집이란 생각만 해도 가슴 뛰고 벅찬데...
그 밭이 20평도 아니고 200평도 넘는다는 게 문제다.
첫 아이가 두 돌 지났을 때 텃밭을 가꾸어 보겠노라고 주말 농장 다섯 평을 분양받아 의욕 충만하게
농사를 시작했다가, 장마철 지나고 남편의 수술 뒷바라지로 다시 2주가 지난 후에 가 보았더니
우리 밭을 찾을 수조차 없이 잡초가 우거져 있던 참담한 실패담을 가지고 있는 우리 부부다.
그런데 이번엔 200평이다.
집 계약을 할 때 집 주인은 텃밭도 꼭 농사를 지어줄 것을 부탁했었다. 하긴 땅이라는 게 그냥
놀리면 풀만 우거지고 망가지기 마련이다. 잘 되든 안 되든 무언가를 계속 심고 가꾸어야 관리가 되는
법이다. 우린 그렇게 하겠노라고 다짐했다.
늘 언젠가는 농사를 지어 푸성귀라도 자급자족을 하는 삶을 꿈 꾸었지만 막상 그 꿈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이뤄지고 보니 대략 난감해졌다. 농사의 기본도 모르는데다가 늘 내 곁에
붙어 있는 두 살, 다섯 살 아이와 학교 수업만 끝나면 총알 같이 집으로 오는 아홉살 큰 아이 거두는 일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 생후 1년도 안 되었는데 송아지만큼 자라있는 개 두 마리도 있다.
이것만해도 숨이 찬데, 5일만에 지방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은 토종닭 병아리 열 마리를 들고 왔다.
닭장도 없는데 닭 새끼부터 들여온 것이다.
45일 된 그 중병아리들은 벌써 3일째 거실에서 닭똥냄새를 요란하게 풍기며 커다란 상자 안에서
삐약거리고 있는 중이다. 아아아... 이 와중에 땅 갈고, 씨 뿌리고, 모종 심을 시절이 온 것이다.
어디에 무얼 얼마나 심어야 할지 감도 없는데다, 미리 이장님께 부탁해서 퇴비도 받아놓아야 하고
밭에다 밑작업도 해 놓아야 하는데 그런 걸 전혀 알리 없는 우리 부부는 시기를 다 놓쳐 버렸고
밭 만드는 일도 마냥 오늘 내일 하다가 급기야 친정 부모님께서 달려오시게 되었다. 칠순이신 친정
아버님까지 합세해서 뒷밭을 일구고 우선 상추와 시금치 같은 잎 채소 씨앗을 뿌렸다.
앞 밭엔 강낭콩을 심었다. 물이 스민다는 아랫 밭엔 토란을 심었고 제일 넓은 윗밭은
세 집이 함께 밭을 갈아 감자를 심고, 기타 씨앗들을 뿌렸다. 다음주에 토마토와 가지, 오이 같은
모종을 심을 예정이다. 고구마도 심고, 4월 말엔 찰옥수수 씨앗도 뿌릴 계획이다.
이 많은 작물들을 어떻게 다 가꿀지 자신은 없는데 사방 널려 있는 땅을 놀릴 수는 없어 뭐라도
심어 놓자는 심정으로 이것저것 뿌려 놓았다. 밭 갈고 씨 뿌리고 심는 일도 모두 사람 힘만
가지고 하다 보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지금이야 농사 시작이라 밭 갈고 씨 뿌리는
일만 했지만 본격적으로 풀이 돋고 싹이 나기 시작하면 일일이 손이 가야 할 일이 넘쳐날 것이다.
하하... 다 어떻게 하려나. 솔직히 아무 생각이 없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이다.
큰 아이가 도움이 되려니... 기대했었지만 아홉살 녀석은 재미삼아 괭이 몇 번 휘둘러 보다가
이내 집어 던지고 가 버린다. 다섯살 딸은 강낭콩 조금 뿌려보고, 감자 몇 알 심어보더니
심심하다며 샐쭉 한다. 두살 막내는 밭에 주저 앉아서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을 우선 제 입으로
가져가느라 야단이다. 그리고는 제 손 잡고 같이 걸어 다니라고 매달린다. 이런 형편이니
당장은 남편 혼자 여기 저기 일 하느라 정신 없다.
그래도 어느새 나는 애들 셋에 개 두마리, 닭 열마리를 거느린 농장 마누라가 되버렸다.
농사도 모르고, 태생적으로 한눈팔기 좋아하고, 시답잖은 글 쓴다고 가끔 밤잠도 설치는데다
읽고 싶은 글이 있으면 살림도 나 몰라라 미루어 두고 빠져드는 주제에 말이다.
아이들은 제대로 돕지도 않으면서 벌써 ‘토마토는 언제 심어요? 딸기도 심자요. 오이랑
참외두요’ 주문하기 바쁘다. 엄마 아빠가 그 모든 걸 척척 거두어 내놓을 줄 아는 모양이다.
흥... 나도 그런 요술밭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남편과 나는 올 해는 뭐든지 시험해 본다 하는 생각으로 지내보자고 얘기했다.
우리 힘으로 얼마나 가꿀 수 있을지,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지 지켜 보자고, 그렇게 한 해
지내보면 내년에는 농사에 대해 조금 감도 잡히고 요령도 더 생길 거라고 말이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우리집 바로 뒤에 전국귀농운동본부 사무실이 있다. 그래서 수시로 농사에 대해
의논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많이 거두려고 하기 보다 아이들과 우리가 뿌린 씨앗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고, 농사에
필요한 일들을 배워가고, 우리가 심은 작물들을 거두는 작은 기쁨도 맛보게 된다면 족하다.
잡초가 우거지고 벌레들도 창궐하겠지만 모든 과정을 다 새로운 경험과 배움이라고 생각한다면
못할 거 없겠거니... 믿고 있다.
그러나 점점 떨어지는 체력은 걱정스럽다.
운동도 좀 하고 몸 관리도 해야 하는데, 매일 매일 세 아이랑 씨름하며 원고 쓰고 1층 2층 넓은
집이 안겨주는 집안 일 하기에도 헉헉거린다.
이 와중에 아직 닭장도 제대로 만들어 주지 못하고 있으면서, 남편은 “토끼도 몇 마리 키워볼까?” 한다.
꽥! 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그런데도 남편과 나는 자주 웃는다. 서로 끙끙댈만큼 몸이 힘들면서도 다시 새로운 계획을 세워보며
좋아한다. 남편도 나도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음껏 꿈 꾸고, 시도해 본다. 실패도 겁나지 않는다.
천하무적 세 아이에 막가파 남편과 나몰라라 마누라가 펼치는 우당탕탕 농사 일기...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