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상복합에 산다. 워워…놀라지 마시라. 명색이 ‘돈 없이 아기 키우기’ 라는 간판 걸고 글을 쓰고 있는 내가 부의 상징인 그 주상복합에 산다면 재밌겠지만, 그런 드라마는 없다. 우리집은 요즘 잘 나가는(?) 주상복합이 아니라 클래식한 버전의 주상복합인 다가구 주택이다. 1층은 상가, 3층은 주인집, 2층이 바로 우리집이다.



우리가 이 집을 선택했던 가장 큰 이유는 첫째, 상당히 저렴한 가격('억'소리 안 남^^), 둘째, 그 가격에 놀랍게도 남향에다 걸어서 5분 내 지하철역, 도서관, 공원 위치, 셋째 사방 1키로 내에 친구 밀집, 마지막이 ‘뽕삘’ 충만한 시장이 있다는 거였다. 물론 정식으로 간판을 내 건 재래시장은 아니지만, 지하철 역에서 이 동네 가장 부유한 아파트 단지까지 가는 길에 소시민들의 생업인 가게들이 오밀조밀 줄지어 있다.



다른 단점도 만만치 않은데, 맹자엄마는 시장을 피해갔다는데, 내 눈에 뭐가 씌였는지 그 드라마틱한(!)  입지적 요건에 반해 그 집을 선택했다.  나는 어렸을 때 시장통에서 두부집 딸로 자랐다. 어릴 때는 두부집 딸로 불리던 게 그렇게 싫었지만,  커가면서 그 성장배경을 누가 묻지 않아도 무슨 대단한 스펙이나 되는 양 떠벌리고 다니고 있고, 결국 다시 그 유사 시장통으로 기어들어가게 된 셈이다.



우리 집 바로 아래에는 대학생 자녀를 둔 50대 부부가 2교대로 빡세게 운영하는 24시간 편의점이 있다. 특히 아저씨는 우유를 사면 소율이에게 직접 구운 쿠키를 공짜로 주신다. 앞 집에는 우체국 국장으로 퇴임하시고 용돈벌이 겸 부동산을 운영하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그 옆에는 이름 있는 베이커리의 반값 가격으로 파격적으로 박리다매하여 성공한(?) 즉석빵집이 있다. 이 빵집의 히트상품 찹쌀도너츠와 꽈배기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다. 그 옆에는 보아하니 형제는 아닌 것 같고, 친구일 가능성이 높은 총각 두 명이서 정육점을 운영하는데, 가끔 거리에서 닭을 토막내는 경쾌한(?) 소리가 우리 집까지 들린다. 그 앞에는 한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과일, 야채가게가 있다. 아버지는 유통, 어머니는 가게 안에서 생산, 아들이 거리로 나와 판매를 담당하는 분업화된 패밀리 비지니스다.



이사하던 날, 아빠는 그러셨다. 이왕 이런 곳에서 살게 되었으니 싸다고 해서 이마트나 롯데마트 같은데 가서 장보면 안 된다고, 이런 데 살면 원래가 아랫집, 앞집, 옆집 서로서로 팔아주는 게 미덕이라고…. 우리야 어차피 생협에서 사먹으니 마트 갈 일도, 아래 가게에서 팔아줄 일도 많지 않을 거라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런데 살면서 아빠가 해주신 말씀이 뭔지 알게 되었다. 매일 그 길을 지나다니며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에 안 팔아줄 수가 없다는 것을….



점심을 먹고 낮잠 자기 전, 우리는 시장을 순시(?)하듯 집을 나선다. 보통은 간단한 인사말만 주고 받지만, 참새와 방앗간 사이처럼 우리는 과일가게를 그냥 못 지나친다.  남편과 이렇게 대형사고(의 결과는 소율이^^) 치고 어쩔 수 없이 정착하고 살기 전까지 나의 꿈은 과수원 집(그 언저리라도ㅋㅋ)으로 시집가는 거였다. 그 정도로 과일을 좋아하던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먹성이 좋은 남편은 과일에 있어서만큼은 나의 ‘주적’이다. 그 사이에 태어난 딸은 우리를 위협하는 무서운 다크호스다. 안 그래도 우리집 엥겔지수가 상당히 높은데, 그 중에서 과일값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높다. (사교육비와 맞먹음^^) 그래서 생협에서 사먹으면서도, 거의 매일 과일집에 드나드는 골수단골로 외상장부가 따로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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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매일 만나는 과일집 총각을 우리는 ‘과일 삼촌’이라고 부른다. 기껏해야 스무대여섯살, 옛날 같았으면 명함도 못 내밀었을텐데 요즘 먹혀주는 외모( <위대한 탄생>의 ‘백청강’ 약간 닮았음)로 살짝 컨트리하고, 앳돼 보이는 인상으로 아빠미소를 지으며 구애를 하는데도, 소율이는 못 본 척, 무관심한 척 시크하게 굴었다. 그런 소율이 때문에 삼촌이 ‘소율이앓이’를 좀 했었다. 웬만해서는 인심 좋기로 소문난 소율이가 유독 과일 삼촌에게는 찬 바람이 쌩~ 했다.



봄이 오니, 소율이 마음에도 봄이 온건가? 오랜 동면을 깨고 나온 소율이가 반가웠던 과일 삼촌이 공짜 바나나 하나를 쥐어주었고, 그 순간 소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과일삼촌과 소율이는 미소를 트는 사이가 되었다.(누구 딸 아니랄까봐 공짜 좋아하기는…) 소율이의 전향적인 자세에 자신감이 충만해진 과일 삼촌은 이제 터프하게 소율이를 덥썩덥썩 안아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과일을 고르는 사이, 소율이가 과일 삼촌 뺨에다가 뽀뽀 비스무리한 애정 표현을 하는 걸 목격했다. 과일 삼촌이 ‘웬일이냐며…’ 폭풍감동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황급히 인사를 시키고, 아이를 건네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겉으로는 티는 안 냈지만…) 내가 지금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거지? 뭔지 모를(딸 가진 부모는 다 아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날 저녁 나는 결국 진정하지 못하고, oooo 신상공개 사이트에까지 들어가보게 되었다. 물론 거기서 유의미한 정보는 하나도 얻지 못했다. 그냥 기분만 엄청 나빠졌다. 김연희씨, 이게 최선입니까?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앞으로 이곳에 계속 살게 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이미 집밖에는 삼촌 팬들이 포진해있고, 앞으로 수많은 삼촌들을 만나게 될 텐데 말이다.



248b612e2dd4e656a5e56ffee9ba8697.옛날 같았으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세상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아이랑 밖에 나가면 어른들은 '안아봐도 돼요?'라고 묻는다. 아이가 할아버지한테 다가가 손을 내밀면, 할아버지가 오히려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 잡아도 돼요?' 묻는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또 조심한다.  아이가 없었다면 술이나 푸면서 푸념이나 하면서 살았겠지만, 그렇게만 살기에는 우리 딸 앞이 너무 창창하다. 세상 속에서 사ㅗ 람들과 마구 섞여서 살아보겠다고 아파트가 아닌 저자거리로, 사람들과 섞이는 일에 이렇게 불안해 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블랙코미디인가…?. 그럼 그렇게 된 세상만 한탄하며 불안해하며 집밖 세상과 최소한의 접점만 유지하며 살아야 하나?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며 가끔 떠들고 다녔던 말들을 리콜이라도 해야 하나?  그럼 모든 게 해결될까? 뭐가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결국 사회 문제라는 것들이 이렇게 단절되고 소외되면서 생긴 일들 아니던가? 진지한 고민에 밤이 깊었다.



그 다음날 우리는 동네 한바퀴를 돌았고, 여느 때처럼 산책의 마지막 코스인 과일가게로 갔다. 과일 삼촌은 지난 밤에 내가 한 일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푸근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과일삼촌, 미안해요...’ 딸기를 사는 것으로 사과를 대신 했다. '삼촌, 좋은 걸로 골라줘요. 어제 딸기는 많이 물렀더라...' 늘 그랬듯이 과일 삼촌은 지갑을 가져오지 않았던 나에게 외상을 주었고, 소율이를 안아주었다. 아직 모든 고민이 정리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간 결론은 세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오늘도 과일삼촌에게로 간다. 주상복합에 사는 소율이와 과일삼촌 모두의 해피엔딩을 위해, 지금은 이게 최선 아닐까?



김연희 http://ecoblo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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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30대 중반, 뒤늦게 남편을 만났다. 덜컥 생긴 아기 덕분에 근사한 연애와 결혼식은 건너뛰고, 아이 아빠와 전격 육아공동체를 결성해 살고 있다. '부자 아빠=좋은 아빠', '육아=돈'이 되어버린 세상에 쥐뿔도 없으면서 아이를 만났고, 어쩔 수 없이 '돈 없이 아기 키우는 신세'가 되었다. 처음엔 돈이 없어 선택한 가난한 육아였지만, 신기하게도 그 경험을 통해 가족, 친구, 이웃과의 관계를 풍요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더불어 몸의 본능적인 감각에 어렴풋이 눈을 뜨 고 있으며, 지구에 민폐를 덜 끼치는 생활, 마을공동체에 재미를 들여가고 있는 중이다.
이메일 : tomato_@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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