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게 ‘어떻게 만든 자식인데’ 론에서 시작됐다.
지금까지 나는 돌잔치에 가는 걸 질색했다. 아이가 안 생겨서 스트레스 받는 마당에 남의 아이 ‘자랑질’ 보러 가는 것도 마뜩치 않았지만 그보다 ‘내 새끼 자랑질은 내 가족에게만’주의자로서 돌잔치는 가족끼리 모여서 밥이나 한끼 먹으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 돌잔치 따위 생각도 안했고, 돌사진 정도만 찍어줄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이모가 “돌잔치는 어떻게 할 건데?” 물어왔을 때 “돌잔치 뭘 해요?” 대답했다가 예의 “어떻게 만든 자식인데”라는 엄마 이하 친인척들의 3중 합창 하모니를 듣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내 의지가 투철했다면야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겠지만 아시다시피 나노미터 단위의 얇은 귀를 가진 터라 “애가 나중에 섭섭해 한다더라” 등등의 몇마디를 듣자마자 바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침 집에 오는 육아잡지에 돌잔치 특집이 나왔다. 샤방샤방한 잔칫상에 알록달록한 아기 한복들을 보니 거의 넘어갔다. 마침내 “돌상은 내가 차려볼께”라는 언니의 지원사격에 완전히 굳히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잡지에 나온 돌잔치 스케줄을 꼼꼼히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부지런한 장소 예약이야 그렇다 쳐도 답례품은 무엇이며, 돌잡이 번호표는 무엇이며, 성장 동영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평소에도 손수건 한장으로 해를 가리려는 마인드를 가진 나이기에 일단 책을 덮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 뭐 5개월이나 남았는데 어떻게 되겠지!”
그러고 두달 정도가 지난 뒤 돌잔치 결정만 유효한 채 장소조차 정하지 않고 까맣게 잊고 살다가 또 다시 이모가 환기했다. “장소 정했니?” “아뇨” “나 환갑잔치 했던 데는 어떠니?” “그러죠, 뭐” 돌잔치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아니라 가격도 좀 비싸고 돌잔치 전문식당이 주는 이런저런 혜택도 없을 것 같았지만 찾기도 귀찮고 무엇보다 왠만한 돌잔치 전문식당은 일찌감치 예약이 마감된다는 풍문만 듣고 그냥 결정해 버렸다.
그리고도 어언 두달이 지나 돌잔치가 한달 앞으로 다가오자 평소의 내가 그렇듯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먼저 돌사진 촬영. 일전에 쓴 칼럼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미리 예약을 하고 한달 반 쯤 전에 찍어서 앨범도 받고 돌잔치에 올려놓을 사진도 골라서 인화해야 한다는데 예약부터 늦어 간신히 휴가까지 내서 사진을 찍고 스튜디오에 애걸복걸해서 돌잔치 이틀 전에 앨범을 받기로 했다.
다음 고민한 건 아이 옷. 보통 아이는 양복을 한 벌 입고 돌잡이 때 한복을 한 벌 갈아입는다고 하는데 대여를 할까 사줄까 망설였다. 사자니 아깝고 대여하자니 괜히 돈만 나가는 것 같아서 또 한 일주일을 고민했다. 겨울철이니 좀 버티면 왕창 세일을 하지 않을까하는 내심 기대를 가지고 하루는 백화점에 들렀다가 유아복 코너에 가서 예쁜 옷을 발견했다. 그런데 셔츠는 한장 밖에 안 남았고 가디건은 이미 품절이란다. 갑자기 급해진 마음에 셔츠와 반바지, 조끼를 골랐더니 세일 기간인데도 십만원이 훌쩍 넘었다. 조끼를 내려놨다 들었다를 반복하다가 맨날 폭탄세일에 물려받은 옷만 입던 아이에게 한번 지르자는 마음으로 카드를 꺼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돌잔치 준비의 수렁으로 들어가는 첫 단추가 됐다.
결혼식도 스튜디오 촬영 없이 대충대충 했던 나였건만 한번 제대로 해주자는 결심을 하고 나니 정말 집에 돈 먹는 하마가 한마리 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돈이 술술 나가기 시작했다. 결혼 이후 7년 동안 정장스러운 옷을 한번도 안 샀더니 번듯한 자리에서 입을 옷 한 벌이 눈에 띄지 않고, 결혼식 때 산 남편의 양복은 왜 이렇게 시골 이장님스럽게 푸근한 스타일인지 걸리는 게 하나 둘이 아니었다.
기왕이면 옛날 도령 스타일로 복건도 씌워주고, 전복도 입혀주기 위해 한복을 빌리고, ‘이인 첫돌기념’이라고 추가 200원을 내고 문구까지 새긴 답례품 주방타올을 주문했다. 돌상차림 준비위원장인 큰 언니는 인터넷 상의 ‘엄마표 돌상’을 샅샅이 뒤지면서 어떻게 하면 싸고 예쁘게 상을 꾸밀까를 밤낮으로 연구했다.
그런데 돈을 아끼기 위해 직접 돌상차리기를 준비하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으니 그 역시 비용이었다. 돌상을 업체에서 하면 꽃에서 초, 과일, 떡과 그릇까지 한 패키지로 따라오지만 이걸 직접 준비해야 하니 떡이나 과일은 물론이고 평소에 쓸 일도 별로 없는 초와 촛대까지 다 사야할 판이었다. 다 사다가는 돌상업체에 맡기는 것만큼이나 돈이 들게 생겼다.
언니와 나는 우선 앞으로 별로 쓸 일이 없는 것같은 물건들부터 ‘맥가이버’ 식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첫번째가 과일과 떡을 놓는 넓고 높은 접시. 적당한 높이의 케이크판은 플라스틱 재질의 싼 것도 2만원. 고심 끝에 집에 있는 빙수 그릇 위에 투명유리 접시를 올려놓기로 했다. 포토 테이블에 놓을 액자들도 다소 계통은 없어 보이지만 집에서 쓰던 것과 백일 사진 돌 사진을 찍으며 받았던 것을 그냥 놓기로 했다. 케이크도 모양은 좀 빠지지만 식당에서 공짜로 제공받을 수 있는 70년대 스타일 케이크를 올리기로 했다. 덕담카드도 따로 준비하는 대신 답례품 업체에서 사은품으로 나눠주는 메모지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복병이 있었으니 바로 돌상의 포인트인 꽃이었다. 유통 담당 기자로 연일 한파로 인한 물가 폭등 어쩌고 하는 기사를 쓰고 있었지만 한파 피해의 직격탄을 내가 맞을 줄이야! 한파에 졸업 시즌까지 겹쳐 꽃값이 엄청나게 오른 것이다. 양재동 꽃시장 근처에 살아 돌상 꽃 담당 미션을 받은 작은 언니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년에 비해 몇 배나 올랐단다. 럴수 럴수... 이럴 줄 알았으면 돌상이고 뭐고 때려치는 건데 라는 후회가 폭풍우처럼 몰려왔지만 이미 걸어놓은 온갖 예약과 주문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돌상에 놓을 꽃 세 묶음과 포토 테이블에 놓을 작은 두 묶음에 꽃병 포함 무려 28만원이나 주고 예약했다. 나의 돌상 전체 예상 비용을 꽃값 하나가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이렇게 돈 쓰고 몸 바쁘고 마음 고생까지 하면서 돌상에 놓을 꽃까지 준비하자 고지가 이제 코앞에 다가온 듯했다. D-10, 9, 8... 여기서 준비가 상큼하게 마무리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만은 사단은 다시 나의 팔랑귀에서 벌어졌다. 누군가 “돌잔치의 하이라이트는 성장 동영상”이라고 말하는 걸 듣자마자 아무런 대책없이 결심하게 된 것이다.
“그래, 엄마표 성장 동영상을 만드는 거야!!!”
☞ 이후에 일어난 갈등과 번민과 가정불화는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