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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워낙에 말이 없는 사람이다.

오죽했으면 시어머님도 남편이 어렸을 때 ‘벙어리’인 줄 알았다고 하실 정도다.

데이트 할 때도 주로 말 하는 쪽은 나였다. 남편은 언제나 빙그레 미소만 지으면서 내 얘기에

귀를 귀울이곤 했다. 그게 좋긴 했다. 나처럼 말이 많은 남자였다면 오히려 질리고 피곤했으리라.

내가 말이 많고, 또 말을 잘 하는 사람이니까 상대방은 잘 들어주는 사람인 것이 더 좋았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짧은 연애 시절에 장점으로 보이던 것들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표현이 없는거다.

모처럼 외출을 하려고 옷을 좀 갖추어 입어도 “예쁘네~” 한 마디 하는 법이 없고, 좀 색다른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도 “맛있다.” 소리가 없는 거다. 살림에 이러쿵 저러쿵 간섭하고 잔소리하는 게

없는 건 좋았지만 그래도 좀 뭔가 감정을 표현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남편은 그냥 늘 말없음으로

지나갔다. 마침내 나는 남편에게 폭발하고 말았다.

첫 폭발은 결혼하고 처음으로 여름 휴가를 강릉에서 시댁식구들과 지낼 때였다. 

시댁이 낯설고 식구들도 어려워서 쩔쩔 매고 있는데 남편은 도대체 내 감정과 상황에는 관심도 없고

자기 집이라고 마냥 편하게만 지냈다. 아주버님이나 서방님은 부엌에 들어와서 마누라 일도 돕고

밥상에 앉으면 상 차리느라 애썼다고 인사도 해주고, 힘든 일은 대신 해주겠노라고 나서주는데

우리 신랑은 도무지 “고생했네, 힘들지? 애썼어. 도와줄까?” 같은 말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데

그렇게 서운할 수 없었다.

참고 참다가 시댁을 나서는 날 대관령 꼭대기에 도착해서 대판 싸웠다.

왜 그렇게 사람이 무심하냐고, 그냥 수고했다 애썼다 한 마디라도 해 주면 얼마나 힘이 나는지

아느냐고, 남편이 내 수고를 알아주면 여자들은 정말 시댁에 잘 할 수 있는데 당신처럼 하면

누가 힘내서 잘 할 수 있냐며 펑펑 울었다. 남편은 당황해서 화를 냈다가 마침내 돌처럼

딱딱한 목소리로 “미안해” 한마디 했다.

그 뒤로 시댁을 다녀올 땐 대관령에서 꼭 한 번씩 싸웠다. 대관령은 시댁이 있는 강릉과

내가 사는 서울을 나누는 심리적 물리적 경계였다. 그곳에 도착하면 참았던 설움이 한 번에

터지곤 했다.

처음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려니 했는데 감정을 표현한는 것도 훈련이고 학습이라는 것을 깨달은

뒤로 남편에게 열심히 가르쳤다. 시댁을 나설 때 “애 많이 썼네~” 하고 한마디 하는데 4년쯤

걸렸다. “수고했다. 고생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상황에 맞게 하는 데도 5년쯤 걸렸다.

프로포즈 할 때에도 쑥스러워서 “사랑한다”는 말을 못했던 남편 입에서 그 말이 어렵지 않게

나오게 하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랬던 남편이었다.



그런데 셋째를 낳고 나서부터 남편이 확 달라졌다.

워낙 힘들게 낳고 고생 고생 하며 돌까지 지내긴 했지만 첫째, 둘째 키울 때보다 훨씬 더 자주

“힘들지? 내가 도와줄께”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말 한다고 해서 실제로 행동으로

모두 옮기는 건 아니지만 말이라도 내 수고와 고생을 알아주는 그 표현들은 나를 기운나게 했고

적지 않게 위로가 되었다. 잠자리에 누워서 귀에 대고 “사랑해”를 속삭여 주는 일도 눈에 띄게

늘었다. 아이들 앞에서도 팔 벌려 안아주고 큰 아이들에게 “엄마, 이쁘지?”라는 말도 할 줄 알게

된 것은 정말 놀랄만한 일이었다.

요즘에는 한층 더 발전해서 집에 있을 땐 아무때고 입술을 내민다. 사실 결혼하고 남편과 키스는 커녕

뽀뽀를 제대로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랬던 사람이 밥상 앞에서도 “여보?” 하며 입술을 내밀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도 다가와서 뽀뽀를 쪽~ 하고 가니 이건 도대체 적응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애들 앞에서 왜 이래?” 하고 화들짝 뛰면 오히려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뽀뽀 하자고 하는데

왜 안하세요. 어서 하세요” 하며 더 좋아한다. 애들 앞에서 자주 부부가 스킨십을 나누는 것이

아이들의 정서발달에도 더 좋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실제로 애 낳고 살아오면서 실천을 하지

못했는데 요즘은 아주 제대로 하고 있다.

이런 변화가 물론 싫은 것은 아니다. 다만 퍽이나 놀랍고, 새롭고, 궁금하긴 하다. 도대체

남편의 심경에 무슨 일이 일어난건가 싶어서다.



“마흔 넘고 애도 셋이나 낳아 주니까 이제 마누라 귀한 걸 훨씬 더 많이 느끼나봐?

예전보다 더 애틋해?” 하고 물었더니 그냥 가만 있는다.



남편 나이 마흔 다섯, 내 나이 마흔 둘...

결혼 9년 동안 세 아이 낳고 정신 없이 살았다. 지금도 정신 없이 살고 있다. 늦게 결혼하고

늦게 부모가 된 우리는 한눈 팔 겨를도, 갱년기니 권태기니 할 틈도 없었다. 늘 우리 곁에는

당장 손을 내밀어야 하는 어린 아이가 있었고 세 아이를 돌보는 일은 같이 하지 않고는

안 되었기 때문에 한번도 여유있게 느긋하게 부부만의 시간을 즐겨볼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50을 향해 가는 나이에 서고 보니 아직도 아이들은 어린데 자꾸 나이 드는 자신이 문득

염려스럽고 곁에서 늘 그 자리를 지켜주는 마누라의 존재가 새삼 고맙게 다가오는 것이...



며칠 전에는 잘 안드는 손톱깎기로 발톱을 힘주어 자르고 있는데 “내가 해줄까?” 하더니 남편이

내 발을 감싸쥐고 발톱을 깎아주었다. 결혼하고 처음이었다. 도대체 쑥스럽고 겁도 나긴 했는데

뭐랄까... 포옹이나 키스보다 마음을 더 따스하고 훈훈하게 채워주는 일이었다.

“이 다음에 늙어서 눈이 잘 안 보일 때 그때 가서 부탁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좋네?”

나는 웃었다. 웃으면서 왠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주책맞게도 마누라 소중하고 귀한 줄 알게 된 것이 왠지 남편이 나이 들었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비 내리고 습했던 올 여름 지내기가 너무 힘이 들어서 나도 부쩍 체력이 딸리고

힘이 드는 걸 느끼는 나날이었다. 막내가 이제 두 살인데 아직 한참은 더 힘나게 움직여야 하는데

벌써 이렇게 힘이드니 어떻게 하나... 걱정도 되고 조금 우울하기도 했는데

사랑한다고 안아주고, 수고했다고 감싸주고, 잠결에 “여보... 고마워”라고 속삭여주는

남편 때문에 다시 힘이 난다.



그래, 그래...

남편에게도 나에게도 서로밖에 없지. 품안에 자식은 언젠가는 제 살길 찾아 훌훌 떠날텐데

함께 늙어가며 서로 의지할 사람이 남편말고 또 누가 있을까.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더 자주

말해주고 더 많이 안아주면서 지내야지. 우리가 서로의 수고와 고생을 알아주고 도닥여주며

남은 인생 오래 오래 같이 가는거야...



부디 40년 후에도 꼬장꼬장하게 내 옆에 있어줘 여보야...

나도 기운 넘치는 할머니로 늙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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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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