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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나이에 만나 짧은 연애를 하고 바로 결혼에 골인했던 우리 부부.

결혼 9년간 띄엄 띄엄 낳은 세 아이를 키우느라 뜨거운 신혼도 누려보지 못하며 살았다.

그 동안 임신 기간만 2년 6개월에, 수유 기간을 합치면 5년 6개월째니, 임신과 수유를 하지

않고 지낸 기간은 딱 1년 정도뿐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남편과 뜨겁고 어쩌고 할 여유도 없었다.

결혼 3개월만에 첫 아이를 가져서 결혼 1주년에 출산을 한 후로 늘 내 곁에는 1순위로 아이들이

누워 자고, 지금도 양 쪽에 두 아이를 끼고 잔다. 부부만 함께 자본 것은 첫 아이를 낳기까지가

고작이다.

첫 아이 때는 처음으로 된 부모 노릇 배우느라 허둥거리며 지냈고, 둘째 아이는 처음으로 낳은

딸 키우며 아들 상대하느라 진이 다 빠졌고, 셋째 때는 그야말로 세 아이 거두느라 정신 없이

지내고 있다.

늘 지쳐있고, 집안 일에 푹 절어서 고단해 하는 마누라는 남편만 오면 무엇 무엇 도와달라

부탁하고 매달리기 바쁘다. 부부끼리 오붓하게 차 한잔 나누기가 쉽지 않은 세월을 살고 있다.

서로의 역할을 해내는 일로도 충분히 바쁘고 힘들어서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의 존재를 제대로

나누며 살아보지를 못했다.

아내와 엄마 이전에 한 사람의 여자로서 내 모습을 지키고 가꾸어 나가는 일은 신경쓸 여유조차

없었다. 늘 젖 냄새 나는 옷을 입고 대충 씻고 아이들에게 뛰어 가는 게 일이었으니 말이다.

남편 역시 직장에서 퇴근하면 집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와 아이들 때문에 언제나 피곤했다.

마누라는 입만 열면 이걸 해달라, 저걸 해달라 하고 아이들도 아빠만 보면 매달리는데다

집안엔 남편 손이 반드시 가야할 일들이 늘 넘쳐나다보니 꾸역꾸역 그 몫을 해내느라

지치다가 가끔은 모른척 눈 닫고 드러 누워도 보지만 맘 놓고 쉬지도 못하며 살아왔다.

그래도 마누라에게 원망과 아쉬운 소리를 더 많이 들어야 했던 남편이었다.



본래 남편은 화초 가꾸는 것도 좋아하고, 물고기 기르는 것에도 취미가 있는데다

이런 저런 것을 고치고 만드는 일에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아파트 생활이라는 게

그렇게 고치고 손 볼 것이 많은 것도 아니고, 세 아이 기르며 화초며 물고기에 취미를 붙이는 것도

한계가 빤해서 남편의 재주가 드러날 기회들이 별로 없었다. 남편은 주말이면 몰아서 낮잠을 자고

잘 움직이려고 하지 않아서 늘 나와 다툼이 많았다.

마당이 있는 집을 간절이 원했던 것은 이런 생활이 오래 되면서 쌓여온 아쉬움과 답답함을

풀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달라지려면 적어도 생활 환경이 완전히 달라지고 변할 정도의

변화가 필요했다. 몇 년을 찾고 기다려서 지금 사는 집을 만났을 때 남편은 이사를 반대했지만

내가 3일 밤을 울며 매달려 허락을 얻은데는 이 집이라면 남편이 달라지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예상은....

물론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추운 1월에 이사를 하고 드디어 봄이 되자 우리는 넓은 텃밭에 농사를 시작했다.

차를 타고 가야했던 주말 농장 농사를 보기좋게 망친 경험이 있던 우리지만, 이 집의 밭들은

바로 마당과 붙어 있으니 슬리퍼 끌고 슬슬 나가기만 하면 된다. 남편은 3주에 걸쳐 주말마다

밭에 매달려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잡초를 뽑고 물을 주며 농사를 짓고 있다.

고작 3주지만 남편은 놀랄만큼 많이 변했다.



가장 큰 변화는 9년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던 진한 남자의 향기가 남편에게서 풍기시 시작했다는

점이다. 봄 볕 아래 땀을 흘려가며 몇 시간이고 혼자 밭을 가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말할 수 없는 매력에 가슴이 설레곤 한다. 벌써부터 그을린 팔뚝으로 땀을 훔치며 집으로 와서

“물 한 잔 줘!”라고 나직하게 말할때는 마치 눈앞에 현빈이라도 출현한 듯 심장이 벌렁거린다.

어떤 주말엔 한나절을 망치와 톱을 가지고 씨름을 하며 닭장을 만드느라 뒷 마당에서 땀을

흘린 적도 있는데, 나무와 공구를 다루는 남편의 모습은 장동건보다도 더 멋져 보였다.

리모콘을 가지고 일곱살 아들과 싸우던 시절의 남편과는 하늘과 땅 만큼 다른 모습이다.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일부러 가격이 저렴한 곳에서 개 사료를 사와 마당에 부려 놓을 때나

자두 나무를 심어 달라는 딸 아이의 부탁을 잊지 않고 묘목을 사와 아이들과 함께 심는 모습을

보면서도 가슴이 설레었다.

체질적으로 술을 잘 못하던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맥주 캔을 사들여오더니 힘들게 일한 주말 밤에

세 아이 다 재우고 나서 나와 한 잔씩 마셔가며 어디 밭엔 고구마를 심고, 옥수수는 어디에 심고

하는 계획들을 말해줄 때는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것보다 더 달콤하게 들리기도 한다.

종일 밭일을 하고 어스름엔 두 마리 개들을 굵은 줄에 매어 운동을 시키기 위해 저수지까지

다녀오기도 하는데, 커다란 개 두 마리를 끌고 사라지는 남편의 뒷모습은 야성, 그 자체다.

하긴 1월의 그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벽난로의 장작을 마련하느라 마당에서 도끼질을 하던

그 모습은 또 어땠던가. 숲속 나뭇꾼에게 이글거리는 열정을 느꼈던 채털리 부인의 심정,

그 자체였다. 하하하.



아파트에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을 관리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큰 눈이 와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 와서 우리는 우리의 일상 모든 것을 직접 관리하고 챙기는 삶을 살고 있다.

매일 어딘가 벌어지고 어긋나는 곳을 손봐야 하고, 나날이 챙기고 시작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남편의 숨겨진 본성과 기질이 하나 하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나는 남편이 집 수리에 재능이 있고, 공구를 다루는 것에 능하고, 가축을 기르는 일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들을 알아가고 있다. 아파트에 살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모습을 너무나

많이 만난다. 이 사람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게 놀랍기도 하고, 살짝 감동도 하고 새삼

근사하다는 느낌도 드는 것이다.



그래, 그래...

집이 바뀌니 남편이 바뀌는구나. 하긴 나도 아이들도 모두 변했지.

집안에서 텔레비젼 켜달라고 조르던 녀석이 저 혼자 개들을 끌고 산자락을 누비며 멋들어진

나뭇가지 찾는 일에 몰두를 하고, 다섯살 딸 아이도 마당의 흙을 파며 놀다가 병아리 모이를

주러 달려가니 말이다.



오늘도 뜨거운 봄 햇살 아래 종일 땅 파고 밭 돌보느라 고생한 남편.

실로 오랜만에 허리띠 한 칸이 줄었다고 자랑하던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바야흐로 슬슬 권태기에 접어 든다는 결혼 10년을 앞두고 찐한 남자의 향기를 물씬 풍기기

시작한 남편에게 나는 새로운 매력을 느껴가는 중이다. 멋지다 울 남편...

그나저나 남편에게서 풍기는 남자의 향기를 그냥 향기로만 맡아야지...

이러다 넷째 생기면... 으아아... 상상도 하지 말자.



늘어진 뱃살 남에서 근육 불끈 매력남으로 바뀌어가는 울 남편.

올 농사는 벌써 내겐 풍년이구나, 얼씨구...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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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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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아기는 만 7개월 된 아기인데요, 밤이고 낮이고 졸려서 눈을 비비고 머리를 박으면서도 자는 것을 거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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