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곳곳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이맘때가 되면, 

이 지역 교회와 각종 단체 40여곳이 힘을 합쳐 저소득 가정을 위한 행사를 연다. 

이름하여 '크리스마스 주빌리(Christmas Jubilee).'

쉽게 말하면 저소득 가정의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골라 갈 수 있게 하는 행사인데,

규모가 제법 크고 벌써 34년째 이어지고 있어 이 동네에서는 꽤나 이름난 연례행사로 손꼽힌다.  


내가 관여하고 있는 동네 한 단체도 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어 올해는 내가 직접 이 행사를 경험해 볼 수 있었다. 

나는 이 단체에서 초등 3, 4학년 아이들과 함께 하는 활동을 하나 맡고 있는데, 

모든 학년 아이들과 그 부모, 가족들이 11월부터 이 행사를 준비해 왔다. 

먼저 아이들은 11월 말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주제로 한 모금행사를 열었다. 

아이들이 직접 만든 작은 악세사리나 간단한 간식류(쿠키, 팝콘, 레모네이드 같은)를 동네 어른들에게 팔아 돈을 모았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돈을 가지고 12월 '크리스마스 주빌리' 행사에 올 다른 아이들을 위해 선물을 샀다. 

어른들은 각자 집에서 기부할 만한 장난감을 챙겨오거나 새 장난감을 사서 한 곳에 모았다. 


그렇게 이 단체에서 모은 각종 선물들은 12월 초, 이 '크리스마스 주빌리' 행사를 주관하는 한 교회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 교회에 모인 물건들은 다시 이리저리 묶이고 나뉘어 동네 24개 교회/단체로 배포되었다. 


12월 13일, 

선물이 배포된 24개 교회/단체에 이 지역의 저소득 가정 부모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자세한 선정 기준은 물어보지 못했지만 이 행사를 주관하는 곳에서 저소득 가정에 초대장을 보내면, 

그 초대장을 받은 가정의 부모가 지정 장소에 가서 참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내가 활동하는 단체에도 열 두 가정의 부모가 초대되었는데, 

속속 도착하는 부모들을 맞아 안내하고, 준비된 다과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일로 행사가 시작되었다. 


내가 맡은 가정에서는 아이가 다섯이나 있는 엄마가 오기로 되어 있었다. 

11살부터 1살까지, 나이도 다양한 다섯 아이의 엄마에게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와 팀을 이룬 동네 아줌마와 셋이 앉아 귤도 까먹고 커피도 마시며 두런두런 아이들 이야기를 시작하니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11살 짜리 첫째는 공부엔 별 관심 없고 치장하는 걸 좋아하지만, 

5살짜리 셋째는 책도 혼자 곧잘 읽고 이러저러한 지적 호기심이 많다는, 

그렇고 그런, 흔하디 흔한 엄마들의 이야기. 

약간 자랑 같기도, 오지랖 같기도 한 세 엄마의 수다가 지루해 질 무렵, 본 행사가 시작됐다. 


엄마 아빠들은 안내에 따라 순번대로 장난감 방으로 이동했다. 

0~3세 방, 4~7세 방, 8~13세 방으로 나뉘어진 장난감 방에는 포장되지 않은 상태의 새 장난감들이 늘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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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는 아이 한 명당 장난감을 세 개씩 고를 수 있었는데, 

한 사람이 한꺼번에 다 골라가면 불공평하니까 한번에 하나씩만 골라 

모든 부모들이 교대로 골고루 물건을 구경하고 '쇼핑'할 수 있게 했다.

(한국에서 이런 행사를 열면 아마 '배급'이나 '배포' 형식이 되기 쉬울텐데, 

이렇게 부모가 직접 쇼핑하는 형식으로 행사가 진행되는 것이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렇게 장난감을 골라 테이블로 가져오면, 

엄마 아빠는 자원활동가들과 함께 장난감들을 예쁘게 포장했다.

어떤 게 누구 선물인지 헷갈리지 않게 쪽지마다 아이들 이름을 써서 포장된 상자에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쪽지는 반드시 '산타로부터' 온 것이어야 했다. 

더 이상 산타를 믿지 않는 열 한살 아이일지라도, 이것만큼은 꼭 산타에게서 왔다고 우길 작정이었다. 

 

내가 맡은 이 엄마에겐 아이가 다섯이나 있으니까 

나는 오 곱하기 삼, 도합 열 다섯 개의 선물을 포장해야 했는데,  

내 생애 이렇게 많은 선물을 포장해보긴 처음이었다. 

사실 나는 한국 살 때나 지금이나 크리스마스라고 선물을 주고받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 경험이 굉장히 신기하고 재미있는 한편으로 힘들었다. 

어디 커다란 장난감 뿐인가, 

크리스마스엔 모름지기 '양말 속 작은 선물'(stocking stuffer)들이 빠질 수 없는 법!

돌돌 말은 수면양말, 장갑, 모자, 작은 봉제인형, 초코바, 사탕 같은, 아이들을 위한 작은 선물도 하나하나 포장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내가 포장한 선물 갯수만 스무 개가 넘어갔다. 

마지막엔 일손도 시간도 모자라 다른 테이블에 있던 자원활동가들이 다 달라붙어 마무리 지어야 했을 정도다. 


그렇게 커다란 테이블 가득 쌓인 선물들은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에 차곡차곡 담겼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까진 아이들이 이 선물의 존재를 몰라야만 하기에,

그 반짝이는 선물들은 한순간에 쓰레기로 둔갑, 

집 안 구석 어딘가에 혹은 차 트렁크에 틀어박힐 운명으로 전락했다. 

그러면 어떠랴, 크리스마스 날 아침, 눈 비비고 일어나 머리맡을 제일 먼저 만져 볼, 

거실 한 켠에 놓인 트리 아래로 제일 먼저 달려갈 아이들의 함박 웃음을 보기 위해서라면!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저소득 가정을 위한 행사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달갑지 않은 시선을 받기 쉽다.

능력지상주의 사회에서는 아이들 교육도, 복지도, 먹거리도, 모두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수준이 달라지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 다른 시선에서, '사람답게 살기', '행복하게 살기'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들을 당연시하기는 어려워진다. 

연말은 특히 그런 생각을 해 보기에 좋은 때다. 

열심히 달려 온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잠깐이라도 한 숨 돌리며 가족과 함께 따뜻한 시간을 보내는 것, 

그건 경제적 여건과 상관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한다.  

어쩌지 못하는 경제적 여건 때문에 하루 하루 힘들게 사는, 

시급직 두어개를 번갈아 뛰어 지쳐가면서도 '부모'이기에 아이들 앞에서만큼은 웃어야 하는, 

세상에선 하찮게 볼 지라도 아이들에게 만큼은 최고의 '슈퍼맨' '슈퍼우먼'인 수많은 아빠 엄마들에게도, 

그런 시간은 주어져야 하는 거다.  


'크리스마스 주빌리'는 바로 그런 시간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 날 만큼은 엄마 아빠가 집세 걱정, 전기세 걱정 하지 않고 아이들만 생각할 수 있도록, 

아이들만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고 예쁘게 포장할 수 있도록.


12월 13일, 

크리스마스 주빌리. 

이 날 하루 만큼은 모두가 그렇게 마음의 짐을 덜고 비밀스러운 산타가 되었다. 

다섯 아이의 엄마 에이프릴도, 

그를 도와 스무 개가 넘는 선물을 포장한 나, 케이티의 엄마도. 

나는 앞으로도 시시때때로 누군가의 비밀 산타가 되어 볼 작정이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매일이 크리스마스인 것처럼 살 수 있게 되기를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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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alyson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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