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공동체에서 3박 4일을 보내면서
그간 얼마나 편하게 살아왔나를 몸으로 느꼈다.
수세식 화장실, 세면대, 샤워기, 언제라도 틀면 나오는 온수….
이제껏 누려왔던 모든 것들에 새로운 물음표를 던져야 했다.

첫날 작업은 밭에서 콩 털기.
한쪽에선 풍구로 티끌을 가려내고 
나는 체에 쳐서 최종적으로 고르는 작업을 했다.
순식간에 머리와 옷,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 썼고
같은 자세로 앉아 체를 흔들다 보니 허리와 다리가 아파왔다.
다엘은 골라낸 줄기와 티끌을 수레로 옮겨 포대에 넣는 작업을 했는데
마을 어른들의 칭찬 속에 지칠 줄 모르고 수레를 끌었다.

일하는다엘1.jpg » 열심히 일하는 다엘

땅에서 수고로움을 거치지 않고 내 입에 먹을 거리가 올 수 없음을
어떤 책도 이보다 더 절실하게 알려주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날은 밭에 쌓인 팥 줄거리 정리작업을 하고
양파를 까서 저장고에 넣었다.
오후엔 땅콩을 한 대야 놓고 껍질 까는 작업을 하며 
공동체에 둥지를 튼 청년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었다.

다엘이 엄마를 떨어져 변산공동체학교에 다닐 수 있으리란 생각,
내가 얼마간이라도 시골 살이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등은
모두가 요행을 바라는 데서 나왔음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정을 마치고 다엘의 생각을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뒷간 땜에 안되겠어. 내 전용변기를 갖고 오면 몰라도.”
기숙사 생활로 집을 떠나야 하는 두려움이 가장 컸을 텐데
차마 말 못하는 진실도 있는 법.

공동체가 생긴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조금씩 변한 부분이 있지만
화장실은 고집스레 처음 형태를 지켜온 이유가 있으리라.
우리 몸에서 나온 것을 고스란히 땅의 거름으로
되돌려주자는 철학은 양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첫날 다엘이 소변보는 칸에 들어갔다가 실수로 큰일까지 본 후
스트레스를 받는 웃지 못할 일도 생겼다.
이토록 기이한 불편을 겪으면서도 
이를 사소하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것이
극단적 생태주의의 핵심이랄까?
극단적, 이란 말이 떠올랐을 때 잠시 숨을 골랐다.
극단이 아닌 보편적 삶을 우리는 주류라고 부른다.
나는 주류의 삶을 아무 의문 없이 살고 있는 걸까?

 1아궁이불떼는다엘.jpg » 사진첨부>변산에서 아궁이 불 지피는 데에 성공한 다엘

이래저래 많은 생각을 하며 귀가했다.
다시 돌아온 학교생활을 힘들어 하던 다엘은 
밀린 수학숙제를 하던 일요일,
급기야 학교에 안 가겠다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다엘의 격한 감정을 우선 다스려야겠기에
오래된 등교 거부증에 마침표를 찍었다.
아예 등교를 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열흘 째 다엘은 학교에 가지 않고
미장원에 출근하여 벵갈 고양이(지난 글에 소개된 유기묘)를 돌보고
고양이가 어질러 놓은 바닥을 청소하고
고양이똥을 치워 비닐봉지에 담아놓는다.
이 모든 일을 미장원 주인 아주머니 출근 전에
바람처럼 달려가 완료해 놓고 있다.

학교로 돌아갈 것인가? 그렇다면 언제? 아니라면 그 후에는?
내 질문에 다엘은 내일까지 답할 수 있도록 시간을 달라고 했다.
등교를 않으면 다음 행보는 온전히 다엘의 몫이다.
그 무게를 본인도 잘 알고 있기에 고민 중일 것이다.

이 와중에 나도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돌아보았다.
다엘의 대안학교를 선택하고 공부를 강조하지 않았던 내 태도가
건강한 철학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됐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나를 과잉보호하며 키웠던 것을
나는 내용은 다르나 똑 같은 방식으로 다엘을 키워왔던 것이다.
아이가 잘못될까 봐(죽을까 봐?) 앞장서서 장애물을 치웠던 일들,
도전에 몸 웅크리며 회피했던 일,
민이의 죽음이 전혀 해석되지 않은 상태로 마음 속에 숨겨져 있었던 것.

‘공부? 별로 중요치 않아.’
‘피아노? 절대음감이 있으니 조금만 하면 잘할 거야.’

이런 확신과, 독이 되는 칭찬은 다엘 앞의 많은 문을 닫아버렸다.
다엘은 노력하는 과정에 대한 ‘격려’는 받아보지 못했고
타고난 재능에 대한 ‘칭찬’만 받았다.
다엘보다 내가 먼저 치유 받아야 함을 깨닫고 길을 찾기 시작했다.

카운슬러를 만나고 부모교육 책을 추천 받고
한편으론 다짐을 위해 이 글을 쓴다.
이젠 꽃길만 이어지게 하기 위해 분투했던 걸 멈춰야 함을 깨닫는다.
어떤 길을 택하든 도피의 방편이어선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진정 다엘에게 필요한 건 내가 쥐어줄 수 없다는 사실 등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1고양이와만남.jpg » 변산의 동네고양이와 포옹하던 다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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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딸이 뇌종양으로 숨진 후 다시 비혼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입양하여 달콤쌉싸름한 육아 중이다. 공교육 교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시민단체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의 상담원이자 웰다잉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지역의 입양가족 모임에서 우리 사회의 입양편견을 없애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초등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대안교육 현장의 진한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이메일 : juin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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