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매달 한 권의 책이 케이티 앞으로 배달되어 온다.

미국인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상상 도서관'(imagination library)이라는 프로그램에 케이티가 등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상상 도서관'은 이 프로그램에 등록된 아이들에게 아이들이 태어난 그 달부터 만 5세가 될 때까지 한달에 한 권씩 무료로 책을 보내준다.

등록 절차는 아주 간단하고, 등록비는 없다. 그렇게 지금까지 받은 책이 여덟 권. 

언제부턴가 케이티와 나는 이 책이 우리 우편함에 들어오는 날을 기다리며 산다. 

특히 이 책은 별도 포장 없이 투명 비닐 하나로만 밀봉된 상태로 우편함 안에 쏙 꽂혀 들어오기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고 들어오는 길에 아파트 층계참에 놓인 우편함을 열었을 때 한 눈에 '그 책'임을 알 수 있어서 책을 발견할 때마다 기분이 좋다. 

게다가 책 내용은 또 어찌나 내 마음에 쏙 드는지, 무료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책을 무작위로 주는 것도 아니다. 

프로그램 운영팀 내에 이를테면 '책 선정 위원회' 같은 게 있어서, 연령별로 적절한 책을 골라 해당 아이들의 연령에 맞추어 책을 보내주고 있다. 


DSCF8023.JPG



그런데 놀랍게도, 이 프로그램은 관이나 어떤 사업체에서 주관하는 게 아니라 민간, 그것도 한 개인이 시작한 일종의 '운동'이다. 

그 주인공은 미국 남부 테네시 주 출신의 컨트리 가수 돌리 파튼(Dolly Parton). 

60~80년대에 미국 컨트리 음악계를 주름잡았다지만 사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찾아보니 그는 3,000곡이 넘는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는데, 그 중 내가 아는 가장 유명한 노래는 영화 <보디가드>에서 휘트니 휴스턴이 부른 I'll Always Love You라고 한다.)

미국 컨트리계의 대스타였던 그는 1995년, 사재를 활용해 고향 마을의 모든 취학 전 연령 아이들에게 매달 책 한 권씩을 선물해 주는 일을 시작했다. 

집안 환경에 상관 없이 모든 아이들이 자신만의 책을 가질 수 있기를, 

그래서 모든 아이들, 모든 가정이 책과 친숙해져 책읽기를 통해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일이라고 한다. 


그의 이 사업이 널리 알려지자 2000년대부터는 미국 전국 각지에서 이 프로그램을 원했고, 

돌리 파튼은 원하는 지역과 제휴를 맺어 프로그램을 확대했다. 

그 결과 현재 이 프로그램은 미국 뿐 아니라 영국, 호주, 캐나다에서도 이뤄져 

1,600여개의 동네/마을에서 이 프로그램으로 매달 책을 받는 아이들의 숫자가 무려 80만명이 넘는다.  


이쯤 해서 '와- 미국엔 그런 게 다 있구나~한국엔 없나..?'

싶은 분들께 또 하나 소개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북스타트(Book Start)!!


대학시절 부터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 나는 한 시민단체의 후원자이자 자원활동가로 활동했다. 

'책읽는사회만들기'는 2000년대 초반 한 TV 프로그램의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라는 코너를 주도/지원한 곳으로, 

그 이후에도 전국 각지에 어린이 전용 도서관인 '기적의 도서관' 건립, 학교 도서관 재정비/지원 사업 등을 꾸준히 펼쳐 온 곳이다. 

북스타트 역시 이 단체의 주요 사업 중 하나다.  


북스타트는 한국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기들에게 그림책 꾸러미를 선물하는 것을 시작으로, 

지역 도서관에서 '북스타트'의 이름을 걸고 아이들을 위한 놀이/책읽기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데 까지 이어져 '책을 매개로 한 사회적 육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돌리 파튼의 상상도서관 처럼 매달 한권씩 책을 주는 건 아니고, 

월령별로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별로 하나의 책꾸러미(가방에 책 두어 권과 놀잇감 한 개 정도를 넣어 구성)를 주도록 되어 있다. 

이 세 단계는 각각 북스타트(3~18개월), 북스타트 플러스(19~36개월), 북스타트 보물상자(36개월~취학 전)라는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가 자원활동 당시 가장 좋아했던 구성은 가방 대신 종이상자에 담겨 나오는 '북스타트 보물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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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2563380)


이 사업은 북스타트 프로그램을 도입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지자체에서 별도의 재원을 확보해 '책읽는사회만들기'와 협력하여 꾸려가는데, 

2003년 서울 중랑구를 시작으로 현재 141개 지자체에서 북스타트를 도입한 상태이다.

그 결과 지금까지 약 56만명의 아기들에게 책꾸러미가 전달되었고, 

이를 청소년기 아이들에게까지 확대해 현재 '책날개'라는 이름으로 초/중/고 학생들에게도 책 꾸러미를 보급하고 있다고 한다. 


한창 이 '책읽는사회만들기'라는 단체에서 자원활동을 할 때, 나는 주로 북스타트를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후원과 관심을 요청하는 일을 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히 북스타트는 지자체의 의지가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지자체를 움직이려면 시민/주민들이 많이 알고 직접 지자체에 문의/건의하는 일이 많아져야 한다. 

코엑스에서 해마다 열리는 '서울국제도서전'이나 홍대 인근(요즘은 파주에서 하는)에서 하는 북페스티벌에 나가 부스를 차려놓으면 참 많은 부모들이 아이 손을 잡고, 유모차를 끌며 내 앞을 지나다녔다. 북적이는 틈새에서 일부러 아이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을 골라 집중 공략했는데, 어떤 분들은 제법 관심있게 들어주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관심 없다는 눈으로 무심히 지나쳐갔다. 그런 이들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아, 우리 애는 다 커서 필요 없어요" 이고 다른 하나는 "아, 우리 동네는 아직 안 하네요? 하면 그 때 책 받으러 갈게요" 였다.


그 때마다 나는 짧은 시간 내에 이 중요한 일의 사회적 의미를 다 담아내지 못하고 돌아서야 하는 나의 말솜씨를 탓해야 했다.

이건 내 아이를 위해 책을 무료로 받는다'는 데서 끝나는 일이 아닌데, 이걸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우리 애는 다 컸어도, 내 동생, 후배, 옆집 아이를 위해 관심을 좀 가져주면 안 될까?

우리 동네는 아직 안 하니까 도입될 때까지 기다리지만 말고, 내가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 알려 구청에 시청에 얘기 좀 해 주면 안 될까?

북스타트도, 기적의 도서관도, 동네 도서관/학교 도서관 지원사업도 모두 '지식/정보 접근의 평등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걸, 

가난한 아이들도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아이들도 책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기회 정도는 가져야 한다는 걸, 

꼭 '내 아이'의 일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란 걸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이런 나의 고민은 다행히도 비단 나만의 고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북스타트가 전국 각지에서 점점 더 많이 시행되고 있는 걸 보니 말이다. 


돌리 파튼의 상상도서관, 

그리고 북스타트. 

이런 프로그램들이 더 널리 알려지고 더 많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이를 통해 우리가 '책'의 의미를 다시금 새기게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아이와 함께 책을 읽으며 나와 타인, 나와 세계의 관계를 생각하고 묻고 답하는 부모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아이'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이들'을 자꾸 생각하는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북스타트 코리아 웹사이트를 링크한다. 

http://www.bookstart.org/foundation.html

우리 지역에 북스타트가 도입되어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혹시나 이 '책읽는사회만들기'라는 단체가 궁금하신 분들은 이쪽으로 따라가 보시길. 

http://bookreader.or.kr/


세상 모든 아기들에게 책 꾸러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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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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