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썸’이 있다면, 미국엔 ‘훅업’이란 게
있다. 한국에서 말하는 ‘썸’의 진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훅업’에서 진도는 많은 경우 ‘삽입
빼고 전부’를 의미한다. 미국이 한국보다 성, 특히 십대의 성에 훨씬 개방적일 것이라는 게 보통의 짐작이지만, 요즘
십대 후반 미국 여자 아이들에게 이 ‘훅업’ 문화는 어찌
보면 복잡하게 얽히고 왜곡된 인정투쟁의 장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아이들이 접하는 여성/여성성의 이미지가 언제나 ‘섹시한 성적
대상’으로서의 이미지인 상황에서, 여자 아이들은 사랑받기
위해, 사랑받을만 하다고 인정받기 위해, 혹은 또래들 사이에서
‘쿨’하고 인기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남자 아이들의 각종
성적 요구에 때로는 자발적으로, 때로는 자기도 모르게,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따른다. 오럴 섹스가 역겨워도, 어깨를 내리눌러 기어이 자신의 사타구니 밑으로 밀어넣는 남자 아이들을 여자 아이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 거부해서 그를 화나게 했다가는 무슨 일이 더 일어날지 모르니까.
돌이켜보면,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대학 초반에 만나던 한 남자와 나는 ‘성 인식과 성 문화 분석’이라는 교양 수업을 같이 듣던 중이었음에도, 그래서 ‘데이트 폭력/데이트 강간’이라는 말을 알고 있었음에도, 데이트와 데이트 폭력 사이를 아슬아슬 줄타기 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최후의 그것만은 면하고 싶었던 내가 선택한 것은, 적당한 선에서 그를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해본 일 없는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 나는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 알아야 했고, 그를 위해 포르노를 찾아 보기에 이르렀다. 미국 십대 여성들이 포르노를 찾아보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상대를 어떻게 해야 만족시킬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라는 대목을 읽는 순간, 그 때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그렇게까지 했지만, 상대 남자는 결국 그 이상을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았다. 참 멍청한 짓이었지만, 결국 ‘그 이상을 하지 않아서 버림 받는다’고 느꼈던 나는 어떻게든 그와 그 이상을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건 내가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안 됨’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당연히, 한 번 ‘예스’하면 다음 번엔 어떤 상황에서도 ‘노’를 할 수 없게 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미국 십대 여성들이 ‘삽입 빼곤 전부’를 하면서도 삽입 섹스만은 하고 싶지 않다며 밝힌 이유와 똑같다.
사실 이 문제는 이성과의 성적 관계에 관한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문제다. 여성의 ‘예스’를 언제나 반기는 남성들일수록, 여성의 ‘노’는 그들에게 언제나 실망, 심지어는 분노로 다가온다. 나의 ‘예스’에 눈빛이 바뀌는 남성들을 볼 때 순간적이나마 적개심이 들거나, 그에게 나의 존재 이유는 이것뿐인가,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일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나의 ‘노’에 깊은 한숨을 쉬는 그의 언짢은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갖은 수를 써야 할 땐 그야말로 피곤했고, 나의 욕구, 나의 욕구 없음, 나의 피로, 나의 감정, 나의 상황을 구구절절 말하는 일은 구차했다. 그런 한편에는 나의 욕구, 나의 즐거움, 나의 감각, 나의 만족에 대해 알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나와 달리 서슴없이 자신의 욕구와 자신의 만족에 대해 말하고, 심지어 그걸 내게 요구하는 남성들에 대한 반감이 차올랐다. 왜 나는 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들을, 남성들은 저렇게나 의기양양하게 할 수 있는 걸까. 친밀함을 무기로 한 성적 요구는 내게 차별로, 강압으로, 폭력으로 다가왔다.
페기 오렌스타인(Peggy Orenstein)은 <걸스 앤 섹스>(Girls And Sex)에서 여자 아이들이 성적 관계에서 자신의 욕구와 만족이 아닌, 상대 남성의 욕구와 만족을 우선시하는 정서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를 얘기하면서 우리 문화에 깊숙이 스며 있는 성차별적인 관습에 대해 말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부모들이 남자 아기와 놀아줄 때는 ‘여기 눈 있네,’ ‘여기 코 있네,’ 뿐 아니라 ‘여기 고추 있네!’하고 생식기를 꼭 집어 말하지만 여자 아기와 놀아줄 때는 생식기가 언급되는 경우가 없다.” “남자 아이의 사춘기는 사정, 자위, 제어 불가능한 성적 충동 이런 걸로 특징 지어지는 반면 여자 아이의 사춘기는 그냥 ‘생리’ 하나로 정의된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중학생 시절 학교에서 진행하는 ‘순결서약식’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왜 여중생이 ‘순결’해야 하는지 설명해준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남자 아이들은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손으로 이상한 사인을 만들어가며 섹스에 대해 떠들고 낄낄거리던 기억이 나는데, 여중/여고를 다니며 고 1때부터 남자친구가 있었던 나는 채팅창에 무작위로 날아들던 동영상을 보기 전까진 섹스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시기를 보냈다. 학교 성교육 시간에 생리와 임신, 태아 발달단계, 출산 외에 여성의 성에 대해 배운 일이 없고, 성교육 시간에 보는 영상물엔 남성의 발기와 사정에 대한 얘기는 있어도 여성 성기의 성적 기능에 대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남자 아이를 기르며 이런 저런 경로로 또래 아이들을 만나다 보면 이런 식의 성차별적인 관습이 내 세대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놀이터에서 놀다 소변이 마려워진 남자 아이가 엄마가 가까이 오기도 전에 대뜸 아랫도리를 벗어 내린 채 종종걸음으로 소변 볼 장소를 찾아댈 때, 나는 그 아이가 여자 아이였어도 집에서 저렇게 무작정 아랫도리를 내리도록 두었을까, 반문한다. 개미가 나타나면 “개미가 고추를 물 수도 있다”며 으하하 웃는 남자 아이를 볼 때, 나는 그 아이가 여자 아이였대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웃으면서, 싶은 생각이 든다. 남자 아이들의 성기가 대를 이어 ‘고추’로 불리고, 남자 아이들이 자신 만만하게 자신의 성기를 내놓을 때, 여자 아이들의 성기를 가리키는 말은 여전히 ‘상스럽다’는 인식을 면하지 못한다. 페기 오렌스타인의 말대로, 여아의 성기는 “말할 수 없는, 이름이 없는” 무엇이다. 한쪽 성의 성기는 그렇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놓고서, 넘쳐나는 포르노와 야동과 몰카의 다수가 오로지 여성의 성기, 또는 성기결합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이 기괴한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하는걸까.
여성들이 성적 관계에서 자신의 욕구와 만족보다는 상대 남성의 욕구와 만족을 우선시하고 때론 당연시하는 태도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여성들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여성은 성적(sexy, sex-appealing)이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성적 욕구는 알지 못하는 무성적인 존재로서 상대의 요구에 순종할 때 사랑받을 수 있음을. 성적 관계에서 상대가 만족하지 않으면 작게는 나의 안위에, 심지어 때로는 나의 목숨에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상대가 요구하는데 거절했을 때 상대에게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를 알기에, 정서적 교감을 특히 중시하는 여성이라면 과격하고 직접적인 위해가 아니더라도 상대의 표정과 제스처 하나 하나를 위협으로 느끼고 상대의 요구에 순종할 수 있다. 위력이란 게 다른 게 아니다. 말 한마디, 그 속의 뉘앙스, 표정, 제스처, 그 모든 것이 성적 관계에서 위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싫으면 저항했어야 한다, 왜 ‘충분히’ 저항하지 않았느냐, 위력에 의한 관계였다면 어째서 그 후에도 그를 가까이 할 수 있느냐, 피해자라면서 피해자답지 않다, 하는 등의 말에 결코 동감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심지어 결혼을 한 부부 사이에도 성적 행위에 권력 관계가 작동할 수 있다. 친밀함을 무기로, 상호간에 정서적 교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무기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억압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데, 권력관계가 뚜렷한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서 그런 일이 없으랴.
“예스는 예스, 노는 노”는 상식이다. 그런 법이 만들어져 있어서 그에 따라 처벌하고 말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상식이 통용되어서 그런 법이, 판결이 만들어져야 하는 게 맞는 거다. 해당 법이 없어 처벌하기 곤란하단 얘길 하면서 법에 대한 정서, 국민적 합의 운운하는 것도 염치없다. 법이,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주로 남성인 이들이 국민절반의 의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예스는 예스, 노는 노” 라는 상식이 상식으로 인정되지 않고 여전히 “안 돼요, 돼요, 돼요”가 우스갯소리로 술자리에서 떠도는 한, 몰카를 찍고, 돌려보고, 사고 파는 행태가 지속되는 한, 친밀한 관계에서의 위력 관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한,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은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세상에, 나는 아이를, 그것도 남자 아이를 내놓았다. 남자 아이를 내 놓은 여성으로서 나의 책무는, 이 아이가 “예스는 예스, 노는 노” 정도의 상식은 기본으로 갖춘 아이로 성장하도록 돕는 일이다. 미국의 명문대 듀크 대학 남학생들이 외쳤다는 “노면 예스, 예스면 애널(항문섹스)!” 이라는 쓰레기 같은 말을 듣고 같이 낄낄거리지 않는 정도의 상식은 갖춘 아이, 용기 있게 나서서 “그 입 닥치라”고 응수할 수 있는 아이 말이다.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누구나 관계 속에서 친밀함을 무기로 권력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경계하고자 상대방과 늘 말로, 행동으로 교감하며 말 뿐 아니라 무언의 신호까지도 알아챌 수 있는 감수성을 갖춘 아이 말이다. 그런 아이로 길러내기 위해,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할 거다. “상대가 확실히 ‘나도 원해’ 하고 말한 게 아니라면 그만 두어라. 상대가 ‘노’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상대가 술에 취한 상태라고 해도. 상대가 처음엔 원했다가 나중에 마음을 바꿨다 하더라도. 어떤 경우든, 그건 ‘예스’가 아니야.” (책에서 인용) 물론 이 이야기를 만 다섯살 아이에게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아이의 연령에 맞게 얼마든지 바꿔 말할 수 있는 얘기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장난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상대가 그만 하라고 하면 그 즉시 그만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일부터 시작하면 되니까.
그리하여 내 아이는 부디 ‘이타적 섹스’를 하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아이가 사랑하게 될 누군가가 이성일지 동성일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게 될지 아닐지, 아니, 과연 무사히 어른이 될 수 있을지 어떨지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꼬맹이를 두고 이런 얘길 하면 누군가는 코웃음을 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참담하고 슬픈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달라진 세상을 보기 위해선 지금, 여기, 내 아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부디 우리의 딸들은 자신의 욕구와 자신의 만족을 아는, ‘이기적 섹스’를 할 줄 아는 여성이 되기를. 그리고 우리의 아들들은 상대의 욕구와 상대의 만족을 함께 공유할 줄 아는, ‘이타적 섹스’를 할 줄 아는 남성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하여 누굴 만나든 서로 진심으로 존중하며 함께 즐거움을 만끽하기를. 부디 그때엔 “친밀한 관계에서의 정의”까지도 당연하게 실현된, 그런 세상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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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페기 오렌스타인(Peggy Orenstein), Girls And Sex
(번역서는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은 질문들>로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