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jpg


지난 일요일, 모처럼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오후를 나 혼자 보냈다.

좋아하는 거리를 마음껏 걸어보고 멋진 찻집에 앉아 글도 쓰리라 생각했는데

전철 종각역에 내려 '종로서적'에 앉아 펼친 책 한권 때문에 마음이 아주 복잡해졌다.

두 시간 넘게 빠져든 책은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이다.

워낙 화제가 된 책이라 호기심에 펼쳤다가 꼼짝없이 붙들려 버렸다.


82년생 김지영은 70년생인 나와는 무려 12년의 나이차가 난다.

그런데 김지영의 경험속에는 너무나 많은 내 경험이 녹아 있다. 읽으면서 깨달았다.

82년생 대신 72년, 90년생 누군가를 넣어도 이상할 게 없겠다.

이건 그냥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자들 모두의 이야기였다.


집에서는 아니었으나 집 밖을 나서면 넘쳐나던 성차별, 딸 많은 집에서 너희만

아들 쌍둥이로 태어났어도 부모님이 고생 안 했을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사람들은

어디나 있었다.
초등시절 담임에게 당했던 성추행, 여중 여고를 거치면서 지긋지긋하도록 겪었던 성희롱과
언어 폭력, 학비에 대한 압박으로 힘들었던 대학시절과 취업에 수없이 좌절되던 스므살 언저리,
복지사 시절 상급기관 관리들을 접대할 때 느껴야 했던 수치심과 분노, 임신을 하고서야 깨달았던
우리 사회의 배려없음과 세 아이 모두 모유를 먹이는 동안 공공장소에서 수유할때마다
당했던 미개인을 보는 듯한 눈빛, 그리고 수유하는 엄마에게도 감추지 않고 보내던 남자들의
음침한 시선들... 직장대신 육아를 선택한 주부였지만 육아와 살림에 대해서는 형편없었던
사회의 인정, 가사노동을 경제적 가치로는 결코 높게 평가하지 않는 남편의 태도까지..
아... 읽는 내내 가슴에 무거운 돌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린이집에서 다쳐서도 오고 제대로 보살핌을 못 받는 정황이 너무 뚜렷한데도 맡길곳이

없어 항의도 못하고 냉가슴만 앓으며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는 여동생도 떠오르고

교수임용 심사에서 제일 훌륭한 연구실적을 가지고도 어린 아이들이 있다는 이야기에

표정이 달라지더니 결국 순위가 아래였던 남자가 뽑히더라고 자조섞인 한숨을 쉬던

후배도 생각났다.

결혼과 임신, 출산과 육아는 이 사회에서 여자들이 더 많은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당연한 조건들이 되었다. 김지영은 그런 속에서 수없이 좌절되고 절망한다.


오랜시간 애쓰며 애정을 기울였던 직장생활마저 육아로 인해 포기하고 종일 아이와 씨름하며
지내는 동안 김지영의 마음속에서는 '자기'라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간다.
마침내 유모차에서 잠든 아이 곁에서 거리 까페의 천오백원 짜리 아이스커피를 사 먹는
자신을 두고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까페나 다니며 놀러다니는 '맘충'이라고 비난하는
젊은 직장인들의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그녀의 의식은 조각조각 분열되어 버리고 만다.
이 소설은 한국에서 여전히 사회적으로 약자인 여자들이 겪는 모든 차별과 모순이 그대로
드러나있다.


교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할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내게 일러준 어른은 없었다.

그게 성추행이었다는 사실도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결혼을 하면 내 삶이 어떻게 재편되는지, 임신과 출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엄마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학교에선 가르치지 않는다.

우린 이런것들에 무지한채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그 속에서 힘겨움의 대부분은 여자들의 몫이다.

나는 미혼인 시절부터 임신과 출산을 공부했던 특이한 사람임에도 막상

아이를 갖고 낳고 기르는 일은 말 할 수 없이 힘들었다. 준비하고 맞은 사람에게도 그렇다.

그래도 내가 원하는 일이었기에 세 아이를 낳아서 내 손으로 길렀다.

그러면서 아이낳고 키우는 일을 직장에 나가 돈 버는 일에 비해 너무나 하찮게 여기는

엄마들을 만났고, 아이와 있는 그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는 모습들이 안스러워

우리가 하는 일의 소중하고 중요한 의미들을 우리끼리라도 알아보고 애써보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눈으로 보이는 돈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돌봄 노동이 없이 가정도 사회도 굴러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끼리 연대하며 의지하고 조언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온라인 공간에서 힘을 얻고 돌아서면 지난한 일상은 그대로다.


82년생 김지영은 자기 안에 있던 이야기를 정신을 놓고나서야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맨 정신일때 얘기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서로 더 불편해지고 어색해지고 힘들어지는 것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이 김지영 탓인가. 그런 얘기를 맘 편히 꺼내놓기조차 어려운

사회의 시선과 관행과 암묵적 침묵을 강요하는 공기 탓이었으리라.

내 딸들에게 꼭 결혼을 해야 한다거나,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말은 물론 안 하겠다.

그러나 엄마처럼 세 명은 낳고 싶다고 말하는 딸들을 볼때 딸들에게 보이는 내 모습이

적어도 불행해보이지는 않는구나 느끼면서도 내가 독립적으로 자기 생각을 가진

딸들로 키워서 사회로 내 보내도 이 아이들이 겪어내야할 많은 차별들을 떠올리는 일은

서글프다. 그래서 엄마인 내가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진다.


시민의 혁명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우리가 뽑은 새 대통령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내가 아는 페미니스트란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통령은 그런 사회를 향하여 많은 것들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지켜보고 지지하거나 반대하며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82년생 김지영도, 70년생 신순화도 07년 생 윤정이와 2010년에 태어난 이룸이도

모두 제 자신을 당당하게 펼쳐가며 충만한 삶을 누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82년생 김지영은 우리의 이야기다. 여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여자들, 모든 남자들이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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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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