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규.jpg

 

혼수로 들고온 TV는 결혼 이듬해 첫 아들을 낳고 9개월만에 시댁으로 옮겨졌다.
TV를 잡고 일어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들을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TV가 있던 자리는 커다란 책장이 대신했다. 아들은 그때부터 책을 블록처럼 쌓거나 허물면서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TV를 좋아하던 남편때문에 곧 다시 들여 놓을 거라고 친지들은 장담했지만 우린 그 후로

두 딸을 더 낳아 기르면서도 내내 TV가 없었다.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연아가 나오던 동계올림픽때는 도저히 그 경기들을 안보고는 못 배길것

 같아서 컴퓨터에 TV가 나오도록 연결했었다. 올림픽이 끝나고도 TV를 계속 보길래 걱정했다가 아파트를

떠나 난시청지역인 지금의 시골 동네로 오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TV없는 삶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줄줄이 메달을 따내는 우리 나라 선수들의 선전이 빛났던 런던 올림픽으로 인해서 우리집은 다시
TV가 연결 되었다. 올림픽이 끝난 후에는 페럴림픽이 있었다. 결국 우린 지금까지 TV가 나오고 있다.

근 9년 가까이 TV없이 살았지만 TV의 영향력은 그 세월을 한번에 뛰어넘어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집에서 보는 '개그콘서트'와 '출발드림팀'에 아들은 열광했고 남편은 뉴스를 마음껏 보며 행복해 했다.
나도 이따금 다큐나 이민호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며 흡족할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염려도 있었다. TV없이 살면서 가족이 함께 홈시어터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곤

했던 호젓한 저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했기 때문이다.

애써서 이만큼 책 읽는 습관을 들여 놓았는데

매일 TV에 매달려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렇지만 곧 이런 염려가 나의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처음엔 틈만 나면 TV를 틀어 달라고 조르곤 했다.
그렇지만 우리집은 케이블 채널이 없는데다 방송3사만 나오다보니

실제로 아이들이 볼 만한 프로그램이 없었다.

어린이 프로가 나오는 시간을 어쩌다 놓치고 나면 아이들이 싫어하는 뉴스나 드라마같은 것만

나오니까 몇 번 채널을 돌리고 나면 '안 볼래요'했다.
주말엔 상대적으로 더 많이 보려고 하지만

오전에 좋아하는 프로 한 두 개 보고 나면

오후엔 주로 밖에 나가 놀거나 다른 활동이 있어서 잊게 되고

저녁엔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예능프로그램 한 두개를 함께 보니까 큰 문제가 없었다.
TV를 켜거나 끄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권한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TV에 접근하는 것도 큰 영향이 있었다.


태어날때부터 TV가 없었던 윤정이와 이룸이는 TV에 크게 매달리지 않는다.

오빠가 보면 함께 앉아서 보긴 하지만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이 나오면

이내 흥미를 잃고 다른 것으로 눈길을 돌리곤 한다.

 

슬슬 청소년기에 접어들고 있는 열살 큰 아들이 제일 TV를 좋아하긴 하지만 학교를 다닐때에는 늘

학교에서  놀다가 여섯시나 되야 집에 오기 때문에 밥 먹고 어쩌다 하면 제가 볼 만한 프로그램은

다 끝나버린 시간이 되어서 평일에는 크게 TV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필규는 제 흥미를 끄는 책이 있으면 그것부터 집어들곤 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동네 도서관에 가서 재미나고 흥미로운 책을 왕창 빌려온다.

가족 1인당 일곱권씩이니까 우리 가족은 한 번에 35권의 책을 빌려올 수 있다.

역사, 만화, 생태, 문학, 지리, 문화등등 다양한 쟝르로 아이의 호기심과

흥미를  채워줄 책을 빌려오는 것은 순전히 내 몫이지만 아들의 기호를 잘 아는지라 큰 문제가 없다.

 

일찍 한글을 떼어 책을 읽기 시작한 필규는 오래전부터 책 읽는 재미를 터득하고 있다.
일부러 책을 읽으라고 하지 않아도 새로운 책이 있으면 꼭 넘겨보고 재미있는 책은 몇 번이고

거듭해가며 읽는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클 수 있었던 데는 내가 중요하게 여겼던 몇 가지 비결이 있었다.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아이의 책은 나도 반드시 읽는다. 아이에게만 읽으라고 던져주지 않는다.

그래서아무때고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 한다.
남들처럼 독서록이나 독후감을 쓰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책을 가지고 어떤 인위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아들은 아주 싫어하기 때문이다.

 다만 함께 읽고 재미나게 이야기할 뿐이다.
또 하나의 비결은 일상에서 아들이 접하는 뉴스나 새로운 소식이 있을때 그것과 연관된 책을 건네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런던올림픽과 페럴림픽에서 큰 화제가 되었던 의족 스프린터 '피스토리우스'의

경기를 보고 난 후 '장애'를 다룬 책을 함께 읽어 보았다.
그 책을 통해 필규는 척추마비 환자가 되었지만 더 의미있는 삶을 살았던 미국의 영화배우

 '크리스토퍼 리브' 의 이야기나 '스티븐 호킹'박사, '헬렌 켈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애를 극복한

 놀라운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다.

독도문제 때문에 한 일간에 큰 갈등이 연일 신문을 장식할 때에는 아예 독도에 얽힌

분쟁의 역사를 정리할 수 있는 책을 같이 읽기도 했다. 태풍 '볼라벤'이 우리나라를 강타했을때에는

당연히 태풍에 관한 책을 읽었다.


일상에서 계속 접하게 되는 내용들을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책들은 언제나 필규를 사로잡는다.
그래서 나는 매일 한겨레신문을 통독하며 신문에 어떤 흥미로운 소식들이 실려 있는지, 필규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은 내용들은 어떤것인지 체크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만연하는 성폭력, 위안부문제, 제주남방돌고래 재판 사건, 사대강에 얽힌 개발과 생태의 이야기 등
신문에 실리는 다양한 내용들을 쉽고 재미있게 풀고 있는 책들이 도서관엔 얼마든지 있다.
물론 이런 이슈와 상관없이 재미나고 좋은 책들도 함께 빌려 균형을 맞춘다.

 

필규는 요즘 '쇠막대가 머리를 뚫고 간 사나이'라는 책을 재미나게 읽고 있다.
'뇌 과학의 역사를 뒤흔든 피니어스 게이지 사건'을 다룬 책이다.

영국에 있는 이민자 추방 센터에서 일어난 실화를 다룬 '아주 특별한 시위'라는 책은

엄마도 꼭 읽으셔야 한다고 해서 부랴 부랴 읽고 있다.

'데츠카 오사무'가 그린 만화 '나의 손오공' 시리즈도 필규가 밤마다 끼고 읽는 책이다.

북유럽 신화, 우리나라 곳곳의 지명들의 유래를 밝혀 놓은 책, 화산과 지진을 다룬 과학책, 여기에
프랑스의 유명한 만화 '아스테릭스 시리즈'까지 필규와 내가 함께 열광하는 책들은 끝이 없다.
그래서 9년만에 붙은 TV와 책의 한판승에서 책이 당당히 이기고 있는 중이다.

 

어릴때 자연스럽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유롭게 책과 친구과 되면 어떤 유혹이 와도 책 읽는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 많이 읽히려고 애쓰지 말고, 책을 읽고나서 독후활동을 하라고 강요하는 대신
아이와 함께 읽고 킬킬거리는 시간을 많이 갖는다면 책은 아이에게 재미와 행복으로 새겨질 수 있다.

오늘은 도서관과 함께 있는 자치센터에서 윤정이의 발레 수업이 있는날이다.
아이들이 다 읽은 책을 반납하고 또 새로운 책을 빌려오는 날이기도 하다.
끝이 없는 책의 바다를 헤맬 수 있는 행복에 또 설렌다.

 

그리하야 적어도 지금 우리집에선

 

책.... 네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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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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