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놀이터에서 놀다 들어 왔더니 그 사이 좌린이 퇴근을 해서 집에 와 있었다.

나 :뭐야, 이거?

좌린 :자두!

 

까만 봉다리에 자두 3천원어치

 

피식 웃음이 났다. 좌린의 소비 생활은 참 소박하다.

외근 나갔다가 길에서 오천원짜리 티셔츠에 오천원짜리 면바지, 오천원짜리 점퍼를 사 입고 무척 뿌듯해 하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옷이나 신발은 닳고 닳을 때까지 쓴다. 헤어지고 빛바랜 옷을 들고 그만 버리자고 하면 이 것이야 말로 제대로 빈티지라며 강하게 저항한다.

그렇다고 싸다고 무조건 사는 것도 아니고, 브랜드나 유행에 현혹되지는 않지만 나름 호불호가 분명하다.

내가 나서서 뭘 좀 사주려다가도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다는 무심한 태도에 의지가 한풀 꺾이고, 나름 까다로운(!) 취향까지 고려해 주려면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그래, 꼭 필요하면 자기가 알아서 사거나 내게 부탁을 하겠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알뜰하다고 말하기는 애매한 것이 애지중지 아끼는 것도 없고 물건을 사면 자기 편한대로 험하게 다루는 편이고 요즘 흔하디 흔한 쿠폰이나 적립금같은 것은 대범하게 그냥 무시한다.

그나마 카메라나 캠핑용품, 몇가지 전자제품에는 관심을 가지고 인터넷 쇼핑몰을 열심히 들락거리면서 상품의 사양부터 제품 후기까지 꼼꼼히 살피긴 하지만 고가의 장비를 지르는 일은 흔치 않다.

자신은 매우 고결하고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기성품으로는 도저히 백퍼센트의 만족감을 얻을 수 없으니, 그럴 바에야 저렴한 물건을 사서 그 물건의 본래 가치보다 2백프로, 3백프로, 그 이상으로 활용하여 뿌듯함을 느끼는 것이 낫다는 것이 좌린의 지론이다.

사진기도 늘 중저가 모델을 사는데, 장비가 너무 비싸면 부담스러워서 맘 편하게 쓰기 어렵다는 이유를 대기도 하고, 목수가 연장탓하면 되겠냐며 그 정도로도 얼마든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근거있는(!) 자신감을 내세우기도 한다.

하여간 좌린은 뼈속까지 '소비지양적인' 인간이며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할 정도로 소비지향적인 사회에서 이런 남자와 같이 사는 것은 조금 재미있기도 하고, 종종 속이 터지기도 하는데, 결혼 십 일년 동안 그럭저럭 둘이 크게 상처주지 않고 마음 맞추어 살아가는 것을 보면 나도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 되어가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까만 봉다리에 자두 3천원어치.

 

2008년, 해람이를 임신했던 그 해 여름에도 지하철 역앞 노점에서 자두를 한 봉지 사 들고 들어온 적이 있었다. 나는 한창 안전한 먹거리에 관심이 많았고 생협 물품들로 살림을 꾸려나갈 때였다.

생산 이력을 알 수 없는, 게다가 한 눈에 딱 봐도 상품성이 떨어지는 조그만 자두들, 좌린은 문구점에서 자두를 사먹던 초딩 시절을 추억하며 사 왔다는데, 그 시절 내 기억 속의 자두는 시고 맛이 없는 과일이었다.

솔직히 까만 봉다리 속 자두의 품질이 의심스러웠고, 노점에서 이렇게 사 들고 들어오는 것이 못마땅하기도 했다. 생협 매장이나 초록마을까지 가는 것은 바라지도 않지만 과일 가게에서 더 나은 것을 사오지 그랬냐고 핀잔을 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런데 나의 기억과 편견과 의심을 물리치고 남을만큼 자두가 참 달고 맛있었다.

 

자두가 이렇게 맛있는 과일이었구나!

내 인생에서 자두를 재평가하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다 먹고나서도 아쉬움이 남아 자두를 사 먹기 시작했고 자두에 대한 사랑은 여름내내, 자두의 계절이 끝나서 생협에서도. 지하철역 노점에서도, 동네의 과일가게에서도, 더 이상 자두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 해 여름에 아루랑 둘이 자두를 얼마나 먹었던지! 아니, 해람이가 뱃 속에 있었으니 셋이 먹은 셈이다. 평소에 좋아하지 않았던 과일이 그토록 '땡기고',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고 맛이 있었던 것은 사실, 뱃 속 해람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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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침으로 자두 먹고 싶어.

 

 

아루가 눈 뜨자마자 자두 타령을 한다. 지난 밤에 자두를 허겁지겁 많이 먹고선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좋아. 그럼 오늘 아침 메뉴는 식빵과 자두로 할까?

응!!! 식빵에 잼바르고 자두 넣어서 샌드위치 해줘!

 

입이 작은 해람이를 위해서 빵 위에 자두를 올려주었더니 자두 케잌이라고 둘이서 또 얼마나 신이 났던지...

뱃속에서부터 즐겨 드신 과일이라서 그런지, 평소에 껍질 때문에 방울 토마토도 못 드시는 예민남, 해람이도 껍질에 아랑곳하지 않고 맛있게, 신나게 먹었다.

아무런 불평 없이 씨도 잘 발라내고!

(지난번에 당진에 갔을 때 해람이가 체리를 입에 넣고 '엄마, 어떻게 해?' 하고 물었을 때 난감하기도 하고 '대체 내가 애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거야?!'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해람이가 씨가 든 과일을 제 힘으로 발라 먹은 최초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해람이는 아루처럼 과일을 잘 먹는 편이 아니고 예민해서 목으로 넘기는 것을 잘 못하고 토하기도 잘 하니까, 병원에서 목구멍이 작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고!!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과일을 늘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주곤 했던 것이다.)

 

유치원에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루는 또 냉장고로 달려갔다.

맛있는 부분을 아껴서 마지막에 먹는 평소의 방침대로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껍질을 먼저 먹어주고 노란 속살이 드러난 자두를 한 입에 넣고 우물우물, 그러고나선 퉤! 식탁위의 조그만 쓰레기통을 겨냥해서 씨를 뱉어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딱 만 하루만에 자두 한 봉지가 동이 났다.

 

아루: 내일, 토요일이지? 아빠 회사 안 가니까 아침에 같이 자두 사러 가자.

좌린: 아니, 이번에는 자두 말고... 너, 혹시 살구 먹어본 적 있어? 살구도 맛있어.

 

잠자리에 들며 좌린이 마지막 자두를 입에 털어 넣고 아쉬워하는 아루에게, 자두 대신 살구를 사러가기로 약속을 했다.

 

살구라고? 살구가 어떤 맛이었지?

내 기억 속의 살구는 별로 존재감이 없는 과일이다. 아직까지는...

내일이 되면 또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2012년 7월 6일)

 

 

 

 

사람 많이 몰리는 테마파크의 불편함에 대해 성토하는 글을 써놓고 강원도 홍천의 워터파크, 대천 해수욕장,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놀러 다녔습니다.

누가 놀러 가자고 하면 사양하는 법을 몰라서요...^^

이름에 대해 궁금해 하셔서 조금 늦었지만 저희 소개를 해 보려합니다.

그러고보니 불쑥 나타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일기장을 펼쳐 보여주고 있었군요, 제가.

좌린과 비니,

남편과 제 별명입니다. 별명이긴 하지만 워낙 오래 써 왔고 웹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쓰다보니 실명보다 더 편하게 느껴집니다. 여행 다니면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 웹에서 알게 된 친구들, 그리고 아이들 덕분에 알게 된 친구들(누구 아빠, 누구 엄마로 불리는 것보다 좋죠!)... 이제는 실명보다 '비니'로 불러주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네요.

작년에 10주년 이벤트(!)를 했으니 올해로 11년차 부부입니다.

결혼 3년차에 둘이 회사를 그만두고 408일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오는 여행을 했고 다녀와서 일년 간 홍대앞 프리마켓에서 여행 사진을 팔다가 사진집 '좌린과 비니의 사진가게'를 냈습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오래 전에 절판 -_-;;; 되었습니다.)

다시 평범한 회사원으로 돌아갔으나 육아휴직을 핑계로 또 집어치우고 수년 째 아이들과 하루 하루 놀며 지냅니다. (놀고 있다는 것이 즐겁게 살고자 한다는 것이지 육아와 가사를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 아님을 밝힙니다. 육아와 가사가 참 힘들고 귀한 일이라는 것을 나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아루는 일곱살, '아름다운 하루'라는 뜻이고

해람이는 다섯살, '해맑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름다운 하루' 대신에 '아, 즐거운 하루', '아, 지루한 하루', 아, 비오는 하루', 그날 그날의 상황에 맞게 '아,OO한 하루', '해맑은 사람' 대신에 '해를 닮은 사람', 드라마 제목을 흉내내어 '해를 품은 사람', '해와 바람'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좋은 부모

가 되고 싶었고 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당분간은 엄마 노릇에 열중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당당히(!) 휴직을 하고 사표를 냈을 때는 그랬죠.

아이들이랑 하루 종일 같이 지내고 있으니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지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엄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우리 사진을 마구 퍼뜨리고 누구 맘대로 우리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거야?'

나중에라도 아이들이 내게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사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제 고민만으로 벅찬 인생입니다.

오히려 아이들의 모습에서 자신감을 얻고 위로를 받곤 하지요.

아이들 곁에서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충실하게 살아가는 법을, 그런 순간순간이 쌓이고 쌓여 내 삶이 된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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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아날로그적으로 살아서 그런지 게시판에 사진 첨부하고 글 편집하는 것이 뜻대로 잘 안되네요.

그리고 댓글 쓰기는 로그인 했을 때만 가능한가요? 지난주 게시물 댓글에 댓글을 달려고 했는데 입력버튼이 작동을 안해서 못 썼거든요. 버벅거리는 놋북 탓인지, 띄엄띄엄한 주인 탓인지, 하여간 댓글에 무성의함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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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진향
사진으로 만난 남편과 408일간 세계일주를 했다. 서로에게 올인해 인생을 두 배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둘이 넷이 되었고, 현재를 천천히 음미하며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돈 벌기 보다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아루(아름다운 하루), 해람(해맑은 사람)과 함께 자연과 사람을 만나며 분주한 세상 속을 느릿느릿 걷는다. 2012년 겨울, 49일동안 네 식구 말레이시아를 여행하고 왔다. 도시텃밭에서 농사를 짓고, 사진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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