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해전 봄. 둘째 아이가 많이 아팠다. 중국에 살던 때였다.
중국에서 제대로 된 진단이 나오지를 않아 애를 끓이다, 결국 한국까지 비행기를 타고 왔었다.
며칠째 40도 전후의 고열의 시달리던 아이는 내 팔 안에서 시든 꽃처럼 늘어져있었다. 공항에서 바로 응급실로 달려갔고, 각종 검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꼼짝 않고 잠든 아이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병명은 가와사키.
얼마후 나에게 온 의사 선생님의 얼굴은 심각했다.
"어머니, 아기가 많이 아파요."
중국에서 조치가 너무 늦게 취해졌고, 탈수가 너무 심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와사키 병은 혈액에 염증이 생기기 병이라, 아이의 어느 기관에 손상이 갔을 지는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다.
휘청, 몸이 휘었다. 병원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까지 이야기 해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호흡이 가빠졌다. 검사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손이, 발이,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선생님 우리 아기 괜찮겠죠? 선생님 우리 아기 괜찮겠죠?"
의식할 틈도 없이 얼굴은 온통 눈물로 덮였다. 나는 의사 선생님들의 가운 끝을 부여잡았다. 정신나간이 사람이 꼭 그 때의 나같으리라.
우리 아기는 괜찮아. 우리 아기는 괜찮아. 혼자서 중얼거리며, 나는 쉼없이 응급실을 서성였다.
그런데, 상황은 악화되는 듯했다. 탈수된 것치고는 아이가 너무 오래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등에 바늘을 꽂아 척수 검사를 해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길고긴 밤이 시작되었다.
아이가 심각한 병일 수도 있다는 검은 불안은 나를 삼켰다.
목안에 커다랗게 녹슨 대못이 박힌 것 같았다. 침은 목을 타고 넘어가지 못했고, 그나마 삼킨 침에서도 시큼하고 쓴 맛이 났다. 잠은 잘 수 없었고, 밥도 넘어가질 않았다.
이것이로구나.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나뿐만이 아니었다. 손녀의 소식을 듣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친정어머니는 버스에서 내내 신에게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어린 손녀를 데려갈 거면 차라리 이 늙은이를 데려가라고.
어디 외할머니 뿐이었겠는가. 아이의 입원은 수많은 친척 어른들의 마음을 거세게 조였다.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까지 우리는 누구도 섵불리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그해 봄, 아이와 나는 오랜 시간을 병실에서 보냈다. 마침내 아이의 병이 나아 병실을 나섰을 때는 매섭던 바람에는 어느새 따스함이 뭍어 있었다. 따스해진 바람을 맞으며, 묘한 안도감에 내 눈에서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그해 봄. 나는 자식가진 부모의 영원한 굴레를 다시한번 깨달았다. 자식의 끝은 곧 나의 끝이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자식잃은 부모에게 남은 인생같은 건 없다"
지난해 4월 나는 세월호의 뉴스를 중국에서 접했다. 스러져간 아이들이 안스러운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나는 남겨진 부모 마음의 부서진 조각들이 밟혀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다시 1년을 맞은 지금. 상황은 말이 안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두 아이의 엄마인 나는 기묘한 공포까지 느낀다. 이 상황이 어떻게 1년 내내 계속 되어 오고 있는가.
이 나라는 내가 알던 나라가 더이상 아닌 것만 같다. 멀어져도 너무 흉하게 멀리 가버렸다.
나는 삭발을 하고 선 엄마들의 마음을 감히 헤아리지 못하겠다. 다만, 나역시 엄마이기에, 그 아픔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다.
때문에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위로 밖에 건네지 못한다. 물론 나의 자장은 크지 않다. 유족지원을 위한 물품을 보내고, 서명을 하고, 글을 쓰고 ...... . 그러나 이 땅의 자식가진 부모가 하나 하나씩 이런 위로를 건낸다면. 그 손잡음이 시간의 풍화 속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슨 좁디 좁은 길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지금 여기를 덮은 깊은 어둠이 두렵기도 하다)
어제 저녁 잠든 아이들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손 안 가득 느껴지는 물컹하고 생생한 아이들의 생명에 나는 괜히 고마워 눈물이 났다.
너무나 미안한 호사다. 그리고 다시 또한번 너무 미안한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