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7살이 됐지만, 아직도 이때처럼 애기처럼 보이는 둘째
"엄마가 안된다면 안되는 거야!"
어린 시절, 나는 엄마의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왜냐? 안된다고 해서 안되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식을 6명 둔 엄마의 막내다. 그러니까 이른바 '슈퍼 막내'
엄마는 나의 무리한 요구도 종종 수용했다.
(물론 내가 반나절을 엄마 종아리에 들러붙어 따라니거나, 거실에 배를 훌렁 까고 눕는 등 온갖 진상짓을 해서 얻어낸 것들도 많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는 나에게 약하다. 자식 중에 특히 나에게 제일 약하다.'
그래서 엄마가 안된다고 선언을 한 뒤에도, 나는 별로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눈물과 콧물을 동시에 질질 흘리면서 웅얼거리며 엄마에게 호소한다. 그런 모습으로 엄마 앞에 설 때면, 나는 읽을 수 있었다.
얼굴에 나타나는 미묘한 표정의 변화. 말로는 "안돼"라고 하지만, 처음보다는 톤이 누그러진 목소리.
"엄마, 제발 이번 한 번만, 한번만, 한번마아안~~~~"
몇번의 실랑이만 오가면 된다. 그리고 결국, "이번만이야, 담부터는 안돼" 엄마는 짧게 한숨을 쉰다.
그럴 때면 엄마는 언제나 덧붙였다.
"나이 마흔에 너를 낳은 내 자신을 원망해야지, 다른 누구를 탓하겠냐"
그때서야 나는 눈물과 콧물을 닦으며 뒤돌아서 씨익 웃었다. '역시, 엄마는 나에게 약하다'
그리고 30년 정도가 흐른 지금. 나는 내가 낳은 7살의 여자 아이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당하고 있다.
"엄마, 제발, 응?응?"
얼마 전 모처럼 2명만 마트로 함께 쇼핑을 나간 날. 나의 주머니는 그야말로 탈탈 털렸다. (아니지 나의 카드가 털린 것인가?)
유아용품 코너를 지나던 길이었다.
"엄마.....유치원에서는 언제나 물병이 필요한데, 이미 가지고 있는 물병은 너무 오래되어서....친구들처럼 공주 물병 있었으면 좋겠어..." 딸 아이가 기운이 하나도 없는 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어느새 카트에 새로운 물병을 넣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는 견학갈 때 쓰는 도시락통도 친구들과는 달리 핑크색이 아니어서 속상하다고 고개를 떨구는 것이 아닌가.
내 손에는 어느새 분홍색의 도시락통이 들려있었다.
그가 통통하고 짧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들 (물론 그 중엔 육류와 간식류도 있었......)에는 뭔가에 홀린 듯 손이 갔다. 딸과 둘이 쇼핑을 할 때면 이 모양이다.
이제 7살에 접어든 나의 막내 앞에서 난 종종 온몸에 힘이 빠진다. 야단을 치려고 하다가도 동그란 얼굴과 코를 바라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서 혀를 깨무는 적이 많았다.
이건 뭘까? 나의 첫째는 똑같은 7살에 다 큰 어린이 취급을 받았는데. 그리고 나에게 어린이답게 의젓해져야 한다고 온갖 잔소리 세례를 받았는데.
왜? 이 친구는 아직도 나에게 작은 아기처럼 보인단 말인가? 첫째와 둘째의 7살은 이렇게 다르단 말인가?
나는 아직도 유치원 가는 길에 둘째를 종종 업는다. 업어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아직도 아기처럼 느껴져 내가 자발적으로 아이를 업는 것이다.
이런 상대성 때문에 종종 첫째에게 미안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예전의 동영상을 보면, 나는 가끔 깜짝 놀란다.
사진 속, 영상 속의 첫째 아들이 너무나 놀랍도록 작고 어린 것이다. 그런데 왜 그 때는 아이가 그렇게 크고 나이가 많은 것처럼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반면, 둘째의 경우에는 그런 간극이 훨씬 작다. 종종 내 기억 속에 있는 아이의 3살이나 4살의 모습보다 크게 보이는 적도 있다.
이런 '자식 상대성'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를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저 어렴풋이 엄마가 이야기했던 '내리 사랑'의 정체가 이것이었나하고 짐작해볼 뿐이다.
엄마는 예전부터 내게 '내리 사랑' 때문에 내가 신경이 쓰인다고 여러번 이야기 했다.
그 때 나는 너무나도 나답게, 엄마는 자식 중에서 나를 제일 사랑한다고 자만했다. 언니들보다 나에게 약한 엄마의 모습이, 분명 사랑의 크기라고 생각했다.
(물론 엄마는 자식은 모두 공평하게 사랑한다고 몇 번이고 이야기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는 내 식대로 해석했다)
그러나 내가 자식을 낳아키우며, 비로서 깨달았다.
내리사랑. 이것은 사랑의 크기는 아니었다.
그저 모양과 색이 다를 뿐이다.
무엇 때문인지 아이를 낳는 순서와 시간의 차이에 따라 인식이 다소 왜곡돼 생기는 그런 현상이 아닐까? 사랑의 크기로 착각될 수 있는..........뭐 그런 이상한 자식 상대성 이론? 아니 현상 같은 것?
백번을 생각해도 나는 아이 2명 다 똑같이 사랑한다. 수치를 잴 수는 없지만 사랑의 크기는 꼭같다. 그러나 그저 내가 낳은 시간의 차이로 작게 자라고 있는 막내에게 더 흐물거릴 뿐이다. 아침에 깨어난 부스스한 모습. 한쪽 눈은 아직 감은 채로 동그랗고 작은 발을 끌며 화장실로 향하는 그 짧은 순간 순간들이 너무 귀여워 가슴이 저릿해질 정도다.
비가 오는 날이면 공들여 우비와 우산과 장화까지 혼자서 챙겨 신는 모습을 보면, 난 속으로 외칠 수밖에 없다.
귀여움의 덫, 귀여움의 감옥, 귀여움의 올가미!!!!!!!!!
이제 내 나이는 불혹에 접어들었건만, 종종 우리 엄마는 아직도 내가 신경이 쓰인다고 한다. 그 말은 곧 나 역시 앞으로 수십년간 이 자식 상대성 현상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 미래가 두렵지 않다. 나는 귀여움의 포로가 될 기꺼운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언제나 자신의 나이보다 큰 아이 취급을 받는 첫째에게 다소 미안한 마음이 생길 뿐이다.
물론 이런 미안한 마음을 큰 아이에게는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있다. 그랬다가는....."엄마, 그렇게 미안하면 마인*래프트 레고 시리즈 하나 더 사주시죠."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터닝*카드를 졸업하고 요새는 레고 덕후가 되었음)
그저 첫째를 자기 나이에 맞게 보도록 노력하는 것, 우선 그것이라도 최선을 다해보는 수 밖에 더 있겠는가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