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바닥마다 낙엽이 수북이 쌓이기 시작하는 계절.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여기저기서 부음이 들려온다.
지난주에는 옆 동네에서 블루베리 농사를 짓던 한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실은 이날이 돌아가신 분과 우리가 처음 인사를 나눈 날이었다.
아무리 내가 좋아서 시작한 시골 살이라고 설명을 해도 젊어서 하는 '사서 고생' 쯤으로 여기는 내 동생이 이 말을 들었다면 “고작 한 번 사먹은 블루베리 가지고, 더구나 겨우 백일 지난 애를 데리고 장례식장까지 가다니. 뭔 오지랖이야. 그것도 병이다” 했으리라.
맞다. 나도 계속 도시에 살았더라면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대형마트에서 가격대비 효율성을 따져 물건을 구매해야 하는 도시의 소비자가 이름도 모르는 어느 산골의 생산자를 떠올려보기란 좀체 어려운 일이니까.
반면에 시골에선 생산자가 곧 소비자고 옆 동네 할배가 내 할배가 되는 일이 어렵지 않다.
사람이 귀해서 인가. 한두 번 만난 걸로도 각별한 사이가 되기도 하는데, 이 블루베리 할배와 우리가 연을 맺게 된 것도 역시 전에 겨우 두어 번 본, 감사하게도 훗날 내 스승이 되기로 자처해주신 어느 소설가 덕분이었다.
하여튼 순박한 노인 부부는 우리 집에 블루베리 배달을 가는 소설가에게 내가 송금한 돈보다 훨씬 많은 양의 블루베리와 잼, 그리고 깻잎 장아찌와 무말랭이 같은 밑반찬을 들려 보냈다. 출산한지 얼마 안됐다는 말을 듣고 이것저것 챙겨주신 것이다.
“시간 날 때 꼭 한 번 들른다고 전해주세요.”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돌아가는 작가님 뒤에 대고 다짐을 했건만, 고인과 조문객이 되어서야 만나지다니...
부고를 들은 날 밤 광주 시내 한 대학병원의 장례식장.
가시는 날까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들었는데 영정사진 속 주인공은 무척 밝은 표정이었다. 개량 한복을 걸친 마른 몸에 자연스러운 미소. 아마 생전에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의 추억이 담긴 사진이리라.
자녀 중 한 분이 수녀라더니 과연 빈소에서는 기도와 성가가 쉴 새 없이 이어졌고, 그 덕분인지 한산한 공간은 쓸쓸하기보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죽음 앞에 한스럽지 않은 생이 어디 있을까. 그래도 자식을 낳고 살다 그 자식들이 다시 손자 손녀를 낳고 저마다의 삶을 사는 것을 지켜보다 어느 날 기운이 다하여 영면했다면 슬프긴 해도 애통함은 덜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죽음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공평하게 한번 씩 치러야 하는 일이지만, 태어날 때처럼 정해진 순서도 없고.
세상은 점점 풍요롭고 살기 좋아진다는데 웬일인지 인재도, 자연재해도 늘어만 간다. 세월호에 올라탔다가 돌아오지 못한 열일곱 살 아이들처럼, 가수 신해철처럼 갑작스럽고 억울하고 황망하게 이별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한 달 전, 동생 친구 남편인 내 또래의 젊은 남자가 퇴근 후 자녀들과 놀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한 뒤로는 죽음에 대한 화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의 죽음을 경험한 건 스물세 살 때였다.
할아버지는 두 차례 위암 수술을 받았는데 안 그래도 말이 없던 분이 치매가 온 뒤로는 더 순하고 조용해져서 식구들은 별다른 긴장감 없이 지냈던 것 같다. 그러다 동네 잔칫날 먹은 고기 한 점이 잘못돼서 응급실로 실려 간 다음 얼마 못 버티셨다.
워낙 술을 좋아하셨던 분이라 가끔 시골집에 내려가면 할머니나 엄마 아빠 몰래 “술 좀 도라”며 구슬픈 눈빛을 했는데 나는 끝까지 모른 척 했다. 어차피 삭막해진 몸에 술 몇 잔이 뭐 대수라고. 게다가 할아버지를 닮아서였는지 나는 술자리를 무척 좋아하는 여대생이었다.
사람이 열흘 쯤 음식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면 바짝 마른 장작처럼 된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할아버지는 고통스럽게 밭은 숨을 몰아쉬며 거실에 일자로 얌전히 누워 있었다. 이틀 뒤 영국으로 갈 예정이었던 나는 베란다와 거실 사이에 있는 통유리로 그런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커다란 이민 가방에 사계절 옷가지며 샴푸 같은 것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중인데, 나는 나 살자고 이러고 있소.
어딘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눈물이 쉬지 않고 쏟아졌다. 임종이 임박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날 저녁 아빠가 채 퇴근하기 전에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나는 속에 것을 여러 번 게워낼 만큼 서럽게 울었다. 할아버지의 어떤 자식들보다 내 곡소리가 더 컸다. 어른들은 할아버지의 첫 손녀에 대한 정이 남달랐다고들 했지만 실은 생전에 할아버지랑 술 한 잔 같이 못 기울였던 것이 후회스러운, 통탄의 눈물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죽음을 마주하는 일도 잦아졌다.
할아버지와 동갑이었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고, 가끔 선후배 부모님들의 부음도 들려온다. 영원히 사실 것만 같지만, 언젠가 내 부모의 순서도 올 것이다.
삶은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일투성이라는 것, 시간이 지나면 어떤 종류의 슬픔이나 상실감도 희미해진다는 것도 서서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백번 양보해도 두렵고 무서운 일이 있다. 바로 나의 죽음이다.
난 정말이지 호방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가늘고 길게 보다 짧더라도 찬란한 삶이 더 낫다고 믿었다. 영화 타이타닉을 보고 난 뒤엔 침대에 나란히 누워 휩쓸려 가던 노부부처럼 남편과 한날한시에 죽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난 뒤 완전히 달라졌다.
죽음이, 아이들과의 영영 이별이 두려워진 것이다.
맛있는 것을 보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내 생각이 날 텐데.
나 없이 맞이하는 아침은 얼마나 쓸쓸할까.
그러다 이 아이들이 엄마가 된다면...
애들도 애들이지만 더 이상 이놈들을 못 본다고 생각하면 당장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을 날카로운 걸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프다.
인생 뭐 없어. 욕심부리지 말고 아등바등 말고 그냥 하루하루 열심히 사랑하며 살어. 지금이 마지막인 것처럼.
냉장고를 열면 할배의 유품과도 같은 블루베리가 나지막이 말을 걸어온다.
굽은 허리를 끙 하고 일으켜는 늙은 남자, 어미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듯 한 알도 허투루 버려지지 않도록 정성을 다하는 투박하고 주름진 손이 어른거린다.
이제 그의 땀과 정성으로 맺힌 블루베리는 더 이상 먹을 수가 없다.
영원할 것만 같은 이 시간이 실은 한정된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야만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나 천사같은 두 아이를 품에 안고서도 여기가 천당인지 지옥인지 오락가락하는 우매한 엄마는 아마도 꽤 오랫동안 이 명제에 의존할 것 같다.
그리고 상상해 본다.
나의 그 날이 오늘이라면 무엇이 가장 후회스러울지.
스마트 폰을 뒤적이거나 글 몇 줄 쓰겠다고 “엄마, 엄마” 하고 네가 부르는 소리를 외면한 것,
허리 아프다고 좀 더 자주 안아주지 못한 것,
맘껏 따뜻하게 웃어주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못한 것,
좀 더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용서를 베풀지 못한 것,
그리고 살아 있는 순간마다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 것.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꿈이고, 좋은 삶을 사는 인생 과제고 간에 지금으로선 이밖에 다른 것은 떠오르지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