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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베이비트리의 이벤트를 통해 읽게 된 책,
<엄마, 아들을 이해하기 시작하다>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엄마에게 아들은
입힌 지 몇 초밖에 되지 않는 바지에 구멍을 내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닌 존재다.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없이 정말, 그렇다.
아들의 옷 중엔 절대적으로 하의가 부족한데, 큰 맘먹고 사준 새 바지를
흐뭇한 마음으로 입혀놓으면 집을 나서자마자 구멍을 내버리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새 바지가 너무 아깝기도 하고 감당이 안돼서 여기저기서 물려받은 바지들을 입혀놓으면,
그건 또 어찌 그리 쉽게, 무릎 부분이 너덜너덜해지는지.
이래저래 아들의 바지는 부지런히 얻어입히고, 새로 사고 해도 늘 부족한데
거기엔 또 하나의 사연이 있다.

아들은 한번 놀이에 빠지기 시작하면, 화장실 가야한다는 걸 잊어버리거나
한껏 흥이 오른 놀이 중에 화장실을 다녀오면, 그 재밌는 놀이를 다시 못하게 될까봐
걱정인지, 거의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소변을 참는 버릇이 있다.
참다참다 뛰어가 화장실에 다다랐을 때엔 다급함이 이미 절정을 넘어선 터라
바지랑 속옷에 젖는 양 1/3, 변기에 조준되는 양 1/3,
그리고 나머지 1/3은 변기 주변에 ...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집에서야 그렇다치고 유치원이나 친구집에서도 이러면
여러 사람이 곤란해지니까  꼭 미리미리 볼일을 보고 놀자며
아무리 얘기하고 가르쳐도,
어른의 훈육은 아들의 놀이를 향한 몰입과 즐거움을 이기지 못했다.
이렇게 적신 바지를 하루에도 몇 벌씩 빨다보니
멀쩡하던 바지도 금새 헌 옷이 되곤 했다.

6살이 되고는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얼마 전에 또, 변기 주변이 물바다가 되어있는 걸 목격한 엄마,
거실에서 놀고있는 아들을 향해 소리를 꽥- 질렀다.
"니가 또 그랬지?? 얼른 여기 와봐!"
화장실로 온 아들이 변기 주변을 힐끗 보면서 하는 말,

"그거, 땀이예요."

... ..."머시라?? 이게 왜 땀이야?"

"더워서 땀 흘린 거라구요."

아들은 그렇게 말하더니, 놀다 멈춘 장난감들에게로 얼른 돌아갔다.
하... 오줌을 땀이라 우기다니!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났다.
요즘 아들과는 이런 일들이 너무 많은데
딸과 나누는 대화가 '예상가능한' 이라면,
아들과의 대화는 늘 이렇게 '예측불허'다.

지금까지 아들의 습관이나 행동을 교정하려 할 때,
긴 설교와 잔소리는 거의 효과가 없다는 걸 이미 깨달은지라
아들의 "땀" 발언에 대해,
왜 변명하느냐, 거짓말하느냐 야단치지 않기로 했다.
<엄마, 아들을 이해하기 시작하다>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아들에게 뭔가를 요구할 때나 야단을 칠 때
가급적 적은 수의 단어를 사용하라.
어휘 수를 최소로 유지할수록 논쟁의 가능성도 최소한으로 줄어든다.

그날 이후로, 아들이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뒤에서 이렇게 외친다.

"아들! 화장실에서 땀 흘리지마~."

뒤를 돌아보던 아이는 씩 웃으며 바지를 내린다.
아들 키우기는 정말 내 뜻대로 안된다. 산 너머 산.
구불구불한 산길을 드라이브하다
갑자기 뛰쳐나온 동물에게 깜짝깜짝 놀라는 기분이랄까.

이런 엄마 마음은 아랑곳없이
아들은 오늘도 제 갈 길을 간다.
동네를 산책하다 사진 한장 찍자고 돌아보라며 수십번 외쳐도
까불까불 자기 노는데만 정신팔다, 앞만 본 채 브이자를 그린다.
에휴.
아들은 내가 만난 남자들 중에 가장 어려운 남자..
이 다음엔 또 뭘 가지고 우기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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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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