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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 소식을 듣고 며칠을 정신 없이 보내다 아이를 데리고 먼 거리에 있는 큰 병원에 정기 검진을 다녀왔다. 마음도 그렇고 해서 진료를 미룰까도 생각했었는데, 최근 케이티의 몸에 또 이상 징후가 생기고 있어서 아무래도 미루긴 좀 그랬다. 특히 이 월초에 잡혀 있는 '협진'은 우리 담당의인 혈관전문의 뿐 아니라 여러 과에서 대표 의사들이 나와 다 같이 환자를 보고 의견을 나누는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특별히 중요한 정기 검진 자리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나오는 건 아니고 항상 듣는 말만 듣게 되지만, 그렇게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전문가'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때로는 위안이 된다. 


오랜만에 본 우리 담당 의사는 그날도 역시 특별한 말이 없었다. 새로 나타나는 증상은 그냥 이 증후군 때문에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그 흔한 증상 중 하나일 뿐, 해 줄 수 있는 것도 안 나타나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고 말했다. 다만 몸 이곳 저곳에 자꾸 뭐가 생기고 뭉쳐지는 건 혈액에 점성이 생기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으니 혈액검사만 다시 해 보자고 했다. 우리 담당 의사를 제외한 열 명 남짓의 '전문가'들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저 우리 아이와 눈이나 맞춰 주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의사들이 우르르 나간 뒤, 아이를 챙겨 1층에 있는 채혈실에 가 버둥대는 아이를 안고 팔뚝에서 피를 뽑았다. 작년엔 애 피 뽑는 걸 보는 게 그렇게 힘들고 안쓰럽더니, 이제 좀 컸다고 저나 나나 훨씬 덜 힘들다. 가져간 전자사전을 켜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주고는 꽉 잡아 앉혔더니 채혈 바늘이 들어가는 순간 한번 와앙- 울고는 이내 훌쩍임으로 바뀌었다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바늘 자국 위에 솜을 덧대어 칭칭, 밴드를 감고는 채혈실 간호사가 건네주는 장난감 하나 받아 들고 의기양양, 채혈실을 나섰다. 


아이가 원하는 과자를 한 봉지 사서 쥐어주고는 차에 올랐다. 아이는 이내 신발도 양말도 벗어던지고 혼자 과자를 우적우적 냠냠 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아이 옆에서 의사가 건네 준 논문 자료를 훓기 시작했다. 이번 협진에서 우리 담당 의사는 처음 듣는 약 이름을 언급하며 이 논문을 내게 건넸다. 기존에 다른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쓰이는 약물을 림프기형이 있는 아이들에게 써 보고 내 놓은 실험 결과였다. 의사는 이 병을 가진 환자들은 나이가 들 수록 필연적으로 증상이 악화되게 되어 있고, 특히 우리 아이는 이 병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다리 부피 차이가 심하게 나타나는 경우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빨리 뭐라도 시도해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반가운 얘기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 자료를 읽어보니 다시 맥이 풀렸다. 해당 약물로 임상실험에 참여한 아이들 수가 열 명도 채 안 되었던 데다, 해당 증상이 있는 부위가 다리가 아니라 모두 목, 얼굴 부위였고 20주 동안 매일 세 번씩 약을 먹으며 추이를 봐도 부종이 '현저하게 줄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한 두 건 밖에 없었던 탓이다. '시도라도 해 보자'고 하기엔 아직 너무 성급한 것 같았다. 


논문을 다 읽고 생각을 정리하며 긴 한숨을 내쉬는데, 그 순간 우리 할매가 생각났다. 

옆에서 크게 부은 오른발을 까딱까딱 거리며 천진하게 과자를 먹는 아이를 우두커니 바라보며, 나는 할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할매요, 할매요. 

우리 아가 다리 좀 고쳐주소. 

할매 다리, 길고 늘씬했잖소. 

그 다리 우리 아들 주고, 우리 아기 오른다리 할매가 가져가소.

할매 내 배 아프면 만져 낫게 하고, 

내 머리 아프면 손 끝 눌러 지압해 주었잖소. 

할매가 믿는 그 예수님은, 앉은뱅이도 일으켜 세웠다 하지 않았소. 

나는 그를 믿지 않지만, 할매는 평생 그를 믿었으니 할매 말은 들어주지 않겠소?

그가 천당 입구에서 할매를 맞아 '마지막 소원이 있느냐' 물으면, 

할매 증손주 다리 고쳐주는 거라 말해주면 안 되겠소?"


부질없는 얘기인 줄 알면서도, 

그냥 이렇게 할매에게 말이나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위안이었다. 

우리 할매, 내 속 얘기 듣고는 예의 그, 안경을 코에 걸치고 빼꼼, 내려다 보는 눈으로 나를 보며 삥긋, 웃었을 거다. "오냐, 내 강아지, 니가 무슨 말 하는지 내 다 안다." 하는 눈으로. 


"걱정 마소, 할매. 

내 우리 아들, 다리가 비록 이래도 마음만은 행복하게 키워낼 거요.

할매한테 배운 손재주로 우리 아들 바지 만들어 입히고 양말 떠 신겨, 

할매한테 받은 사랑으로 우리 아들 사랑 듬뿍 주어, 

따뜻하고 예쁜 아이로 키워낼 거요. 

그러니 할매, 걱정 말고 잘 가소. 

그저 한번씩 우리 세 식구 내려다 보며 기도나 해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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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alyson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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