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8일은 우리의 결혼 기념일이다. 

우리에겐 사실 여러 개의 '기념일'이 있다. 결혼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들인데, 하나는 혼인신고 한 날, 하나는 양가 식구들 앞에서 결혼서약 한 날, 나머지 하나는 실제로 같이 살기 시작한 날이다. 이 중 우리가 '결혼 기념일'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두 번째, 양가 식구들 앞에서 결혼 서약을 한 날이다. 


3년 반 넘게 연애하던 우리는 내가 미국 대학 박사과정 진학에 실패하면서 큰 기로에 놓이게 됐다. 입학 허가서를 받은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고 따라 가서 살 것인가, 혼자 한국에 남아 일을 할 것인가. 이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빠르고도 결단력 있게 전자를 택했다. 양가에 우리의 선택을 알렸다.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혼인신고를 먼저 했다. 그리고는 5월 어느 날, 둘이 대학로 한 까페에 앉아 양가 식구들에게 전할 초대장을 써내려갔다. 우리의 결혼식을 대신할, 상견례 겸 결혼서약 자리에 부모 형제를 초대하는 글이었다. "저희를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누구보다 더 사랑해 주신 어머니, 아버지, 형제들과 모여 따뜻한 밥 한끼 먹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십대 이십대 내내, 힘들게 살아온 우리였다. 남편은 가난한 시골 농사꾼의 막내 아들이었고, 나는 가난한 영세 자영업자의 맏딸이었다. 부모님 사이는 늘 좋지 않았고, 남편은 형제 관계라도 좋았지만 나는 하나 있는 남동생과 풀기 어려운 관계 속에서 살았다. 둘다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이 아니었더라면 대학엘 다닐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남들은 '우리도 다 빚내서 학교 다녔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 흔한 빚도 낼 수 없는 처지였다. 나는 대학 2학년 때부터 학원 일을 하며 번 돈으로 네 식구가 사는 지하방 월세며 공과금을 내며 살았고, 빚도 낼 수 없어 힘든 아버지에게 알바로 번 돈 백만원 이백만원 빌려드렸다 되받았다 하며 속을 끓여야 했다. 내 부모가 살아가는 방식이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늘 가시돋힌 말로 서로를 할퀴기 일쑤였다. 도망치고 싶었고, 살기 싫은 날도 많았다. 그 와중에 만난 한 남자가 내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연애하는 동안 그는 단 한번도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아프게 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지지리 가진 것도 없으면서 할 줄 아는 거라곤 그저 '열심히 사는 것' 밖에 없던 우리에게 우리는 서로의 지지자이자 역할 모델이었다. 


5월 28일, 종로의 한 한식당에 양가 식구들을 모두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다. 비싸고 좋은 음식은 아니었지만, 그렇게라도 한 자리에 모여 뭐라도 할 수 있어서 기쁜 자리였다. 그리고는 우리가 만든 '약속'판을 보여드렸다. 결혼식도, 결혼반지도, 양가 예물이며 혼수도 모두 할 능력도 시간도 없었던 우리였지만 뭔가 우리끼리 간직할 만한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남편이 제안한 것이 우리가 살면서 기억해야 할, 함께 지켜나가야 할 세 가지 약속을 정해 나무판에 새기는 일이었다. 문구를 같이 만들고, 인사동 어딘가에 있는 작지만 이름 난 어느 가게에 이 나무판 제작을 의뢰했다. 서약 자리에서 이 나무판을 같이 읽는데,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굉장히 떨렸던 기억이 난다. 그 순간에서야 실감했던 것 같다. 나와 그가 양가에서 떨어져 나와 '우리'가 된다는 사실이. 그 자리, 그 순간에 나는 참 많이 힘들었고 원망스러웠던 내 성장의 기억, 내 부모 밑에서 보낸 아픈 삶의 기억이 살풋 떠올랐다가 마음 깊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함께 정한 세 가지 약속은 다음과 같다. 

1. 서로 존중하며 통하려 노력한다.

2. 가사를 고르게 나눈다.

3. 충만한 삶을 모색하며 실천한다. 


이 세 가지 약속은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요약하고 있는데, 나는 특히 세 번째 약속을 가장 좋아한다. 내가 가장 많이 노력해야 지킬 수 있는 약속은 1번이고, 2번은 굳이 상기시키지 않아도 될 만큼 잘 지켜가고 있다. 결혼 3주년만에 벌써 우리에게 18개월 차 아이가 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이 약속 판이 우리와 함께 있는 한 우리는 늘 1번, 2번, 3번 약속을 상기하며 열심히 즐겁게 살아갈 것을 믿는다. 우리가 너무 특별해서 우리 아이가 케이티를 갖고 태어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받아들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쩔 수 있나. 이왕 이렇게 살게 된 것, 열심히 재미나게 한 판 살다 가는 수밖에. 우리의 특별한 선택과 특별한 삶, 그 삶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케이티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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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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