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이랑 함께.jpg

                 (구정 다음날, 경포대,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

 

 내 시댁은 강릉이다.
결혼하고 한 5년 정도는 대관령을 넘기만 하면 배가 아팠다.
여기서부터는 씨월드가 시작되는 구나.. 하는 생각에
집에서는 멀쩡했다가도 대관령만 도착하면 두통에 소화불량이 생겼다.
명절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관령에 이르면 아프던 머리며 배가
씻은듯이 나았다. 이제 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대관령은 마이월드와 씨월드가 나뉘어지는 심리적 물리적 경계였다.

친정과는 너무나 다른 문화와 풍습, 음식이며, 어떤 일이던지 척척 해내는

형님과 동서 사이에 맨 마지막 며느리로 들어간 나는 쉽게 제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서툴고 어설퍼서 일도 제일 덜 하면서도 식구들이 어렵고, 낮설고, 불편했다.

시댁에 도착하는 그 순간부터 집에 갈 날만 고대하며 지내었으니 몸이며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실수도 많이 해서 나이 어린 동서에게까지 야단을 맞을 적에는

정말이지 시댁에 다시 오고 싶지가 않았다.

 

큰댁이며 작은 댁이며 일가 친척들이 많아서 명절이면 이곳 저곳 다니며 제사를 지내고

인사를 드리는 일에 하루 꼬박 걸리곤 했다. 대 식구 뒷치닥거리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엌일에 시달리다보면 명절 연휴는 금방 지나가 버렸다. 식구들끼리

제대로 회포를 풀 여유도 없었다. 어렵게 모여서 내내 일만 하다가 다시 분주하게

흩어지는 시댁에 오래 마음이 가지 않았다.

처녀적엔 강릉을 너무 좋아해서 콘도를 빌려가며 친구들과 수시로 여행을 왔었는데

강릉으로 시집을 오고 나니까, 명절에 어렵게 시댁엘 내려와도 부엌과 마루만 종종거리며

오가느라 연휴를 다 보내곤 했다. 마지막 날엔 시댁 나서기 무섭게 막히는 고속도로를 달려

집에 오기 바빴다. 코 앞에 바다가 있어도 유명한 관광지가 즐비해도 다 그림의 떡이었다.

고단하고 지친마음으로 시댁을 나와 고속도로에 오르면 괜히 속상하고 아쉬워서 눈물도

찔끔거렸다.

 

그러나 세월은 참 용해서 한 5년 쯤 지나고 나니 크게 불편하고 어려운 것들이 사라졌다.

일이  갑자기 쉬워질리야 없지만 사람들을 겪고나니 서로 이해가 생기고 정이 생겨

관계가 편해진 것이다. 여전히 서툴고 어설프지만 형제들에게 인색하지 않게 베풀고

시부모님이나 형제들, 조카들에 대한 애정이 생기면서 더디나마 내 몫을 해 내는 모습들을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자 더 이상 불편할것도 어려울것도 없었다.

몸이 힘들고 고단한거야 변함없지만 마음이 편해지니 시댁은 더 이상 힘든 곳이 아니었다.

전에는 형님과 동서 사이에서 이런 저런 눈치를 보느라 하고 싶은 일들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는데 이젠 며느리로서 도리를 다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족끼리 좋은 추억을 만드는 일도

소중하다고 당당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명절 마지막날 시댁을 나서고 나면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장소로 차를 돌린다.

우선은 바닷가로 달려간다. 아이들도 나도 강릉의 시퍼런 바다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바닷가도 걸어보고 파도랑 장난도 치고 아이들과 사진도 찍는다.

그동안은 계속 어린 아이가 있어 마음 놓고 이런 여유를 부려보지 못했는데 이젠 막내도

네살이어서 다 함께 어디라도 갈 수 있게 되었다.

 

올 구정엔 처음으로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향긋한 커피도 마셨다. 아이들은 코코아와

와플을 먹어가며 즐거워 했다. 강릉이 커피로도 유명한 곳인데 전에는 한번도 이런 여유를

부려볼 마음을 먹어보지 못했었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 마음의 여유가 없던 탓이다.

 

바닷가에서 신나게 논 다음에는 구불 구불 이어지는 옛 대관령 길을 넘는다.

대관령 터널로 가면 훨씬 빠르지만 나와 아이들은 이 옛길을 더 좋아한다. 재미나기 때문이다.

급 커브만 나오면 '조심해!'하며 소리를 질러가며 일부러 요란하게 차 안에서 뒹굴곤 한다.

아이들은 이 길을 '조김해 길'이라고 부른다.

대관령을 다 넘으면 용평리조트로 향한다. 물론 스키를 타기 위한 것은 아니다.

천미터가 넘는 발왕산 정상까지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아이들은 너무나 좋아한다.

추석엔 단풍이 볼만하고 구정엔 정상에서부터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모습을 보며 설경을

즐길 수 있다. 올 구정엔 날이 춥지 않아서 정상에 도착해 한참동안 즐겁게 놀기도 했다.

 

이렇게 놀다가 오후 네시 무렵쯤에 비로소 집으로 출발한다.

신나게 논 아이들을 차를 타면 바로 곯아 떨어진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릴때도 있지만

늦더라도 저녁은 집에 와서 해 먹는다.

전에는 조금만 늦어도 밖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오는게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살림 11년차가

되다보니 이젠 조미료와 첨가물 범벅인 휴게소 음식은 질색이다. 당장 먹을 반찬이 없어도

내가 지은 더운밥이 최고다. 마흔 넘어 비로소 철이 든 모양이다.

 

제사만 끝나면 가족끼리 외식도 하고 여행도 가는 집들도 많이 있지만 우린 건강이 좋지

못한 부모님이 계신데다 일가 친적이 많아 그런 연휴는 불가능하다. 당분간도

시댁에 내려오면 내내 일 하다가 나서야 되겠지만 조금씩 즐거운 일들을 만들려고 한다.

중화요리에 관심이 많은 첫째는 강릉의 맛집을 섭렵해야 한다고 벼르고 있고

내려올때마다 유명한 곳들을 차례차례 다녀보자고 조르고 있다. 이번엔 '1박 2일'에 나왔던

강릉 중앙시장표 닭강정을 사 먹기도 했다.

다음엔 커피 장인이 직접 운영한다는 유명한 카페에도 들려보리라.

 

전에는 우리끼리만 이런 곳에 다니는 것이 죄송하기도 하고 눈치도 보여 망설였지만

가족마다 상황이 다르고 욕구도 다른 만큼 우리가 원하는 일을 조금씩 한다고 해서

이기적일리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며느리로서의 도리도 열심히 하고, 가족끼리 즐거운 추억을 만드는 일에도 정성을 들여가며

씨월드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늘 서툴고 일 잘 못하고 실수 투성이인 며느리라 주눅들어 있기도 했지만 이제 결혼 11년차

들어선 며느리는 못하는 건 못하는대로 잘 하는 건 잘 하는대로 부끄럽지 않게 내 자리를

지켜가며 마음에 품었던 소박한 즐거움들도 누릴 줄 알게 되었다.

11년의 세월동안 적지않게 진화한 셈이다.

 

어떤 기대도 즐거움도 좋다. 그것으로 인해 씨월드가 더 그립고, 가고싶도, 설레어 진다면

얼마나 좋은가.

막내가 조금만 더 크면 아이들과 스키를 배워 언젠가는 시댁에 강릉에 내려가 용평에서

스키를 타는 날도 만들어야지.

간이 커진 며느리는 오늘도 계속 행복한 진화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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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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