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룸 16.jpg

 

막내 이룸이가 병설유치원 6세반에 입학을 한 후 첫 상담이 있었다.

미리 상담 설문지를 작성해서 제출하긴 했지만 사실 딱히 상담하고 싶은

내용은 없었다.

유치원과 친구들과 선생님을 너무 너무 좋아하며 즐겁게 유치원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매일 보고 있는 터였다. 단지 처음 해보는 단체생활에서 내 아이의 모습이

궁금하긴 했다.

 

젊고 이쁘장한 담임 선생님은 생글 생글 웃으며 나를 맞아 주셨다.

"유치원 상담이라는게 아이의 생활을 살펴보고 유치원에서 더 도와주어야 할 부분이나

가정에서 신경써줘야 하는 면들을 이야기하는건데요, 이룸이는...

못하는 건 하나도 없구요, 잘 하는 건 너무 많아요"

은근 기대하고 오긴 했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말문을 열어주시니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이룸이, 아주 잘 하고 있는거.. 어머님도 아시죠?"

"네?  아... 네..." 나는 멋적게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어휘력이 정말 뛰어나요. 설명도 너무 너무 정확하게 잘 하구요, 어떻게 이렇게 잘 할 수 있나..

궁금했는데 어머님이 글 쓰시는 분이셨군요? 이유를 알겠네요. 호호"

아이고, 정말 부끄럽고 좋아서 몸둘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주말 지낸 이야기를 하면 이룸이는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항상 손을 들어요.

시켜보면 이야기를 정말 잘 하구요. 친구들이 잘 못하거나 서툴게 하는 일이 있으면

어느새 이룸이가 나타나서 도와줘요. 이룸이 선생님이예요."

 

"어디서 그런 마음이 나오는건지, 아파서 안 왔던 친구가 오면 양말발로 뛰어나가

괜찮아? 보고싶었어 하며 꼭 안아주고요.

항상 밝고 긍정적이어서 친구들한테 인기가 많아요. 모두 이룸이 짝이 되고 싶어해요.

이번 6세반엔 유난히 언니 오빠가 있는 세째 아이들이 많아서 사회성도 좋고 협동도

굉장히 잘 되는데 이룸이가 수업 분위기를 확 잡아줘서  수월해요.

발육도 빠르고, 배움도 빠르구요. 가위질도 잘 하고, 종이접기도 잘 해요."

 

나는 기뻐서 얼굴이 발그레 해졌다.

 

"첫 아들을 힘들게 키우는 동안 여러가지로 발전 속도가 느려서

마음고생을 했었느데 마흔에 낳은 막내 때문에 어깨가 으쓱해지네요."

했더니

"이룸이는 7세반에 올라가도, 초등학교에 입학을 해도 으쓱해지실 일이 많을거예요"

이렇게 훈훈한 쐐기를 박아주신다.

 

잘 하고 있으니 칭찬을 많이 해주라는 말을 들으며 상담실을 나오는데

구름위에 둥둥 뜬 기분이었다.

첫째도 둘째도 유치원에 다닌적이 없어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뿌듯함을

막내를 통해 종합선물셋트로 받는 기분이었다.

 

늦게 결혼해서 첫 아들을 낳았을때, 그것도 4.1킬로나 되는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고보니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었다.

손자를 고대하시던 시어머님이 이름을 지어오시면서

"장관이 될 이름이라더라" 하셨을때도

'겨우 장관.. 대통령이 되도 시원찮을텐데..'하며 살짝

속으로 콧방귀를 뀌기도 했었다.

그렇다. 잘나고 특별한 내 아들은 장관이 나이라 대통령이

된다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매일 매일 튼실하게 자라는 아들을 보며 수없는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써 대던 시절이었다.

 

옹알이만 해도, 연필 잡는 시늉만 해도, 글씨 비슷한 선을 그리기만 해도

영재의 증거같아서  이다음에 이렇게 훌륭한 아들을 키우신 비결을 묻는

인터뷰 준비를 미리 미리 해야하지 않을까...... 고민했을 정도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밖에 안 나온다.

영재 인터뷰를 고민하게 하던 아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도 오랫동안

가위질이 서툴러 오리는 일을  싫어했고, 글씨 쓰는 것을 아주 싫어해서

일기 몇 줄 쓰려면 한나절씩 걸리곤 했다.

가방엔 딱지만 가득 넣어가지고 학교에 다니다가 적응을 못해서

2년만에 대안학교로 옮기는 과정에서 마음고생도 많이 시킨 아들이었다.

4학년 여름방학 무렵에야 간신히 구구단을 외운 아들은 지금도 수학을

싫어하고 남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는 것은 더욱 싫어하며

만화와 책, 영화와 축구, 놀이로 열세살의 여가시간을 가열차게 보내고

있는 중이다.

아들은 아들만의 속도대로 가는 거려니... 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해서 딸들은 오빠와 좀 달라주기를, 조금 더 잘 적응하고

기왕이면 학교 생활도 좋아해주고, 그리고.. 그리고... 내친김에

공부도 좀 잘 해 주었으면... 바랬었다.

 

그런데 유치원에 다니지 않고 입학한 둘째가 학교생활을 야무지게

해 내고 있는 것도 고맙고 대견한데 여섯살 막내가 그야말로

내가 미처 기대하지도 않던 부분까지 이렇게 잘 해주니

늙은 엄마는 입이 귀에 걸려 산다.

 

유치원 생활 잘 하는 것이 이다음의 성공까지 보장해줄리 없고

꼭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지만 어쩌면 정말 막내만은

정말 정말 진정한 영재가 아닐까 하면서 나는 또  자작소설을 쓰며

행복해 하고  있다.

 

소설이 소설로 끝나도 좋고, 영재든 아니든 상관없는 거야 물론이다.

만 5년을 엄마와  붙어 지내던   막내가 이렇게 즐겁게 그리고 대견하게

유치원 생활을 잘 해주고 있으니 고마울 뿐이고, 이게 다

말 많고, 자기 주장 강한 오빠 언니 덕분인지도 모른다며 첫째와

둘째에게도 새삼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이룸 17.jpg

 

마흔에 낳은 셋째 덕에 이 나이 되도록 웃으면 산다.

어린딸 마중하러 학교가는 길이 즐겁고, 유치원에서 일어난 일

조잘 조잘 들려주는 막내의 목소리에 하루의 피곤이 풀리는 요즘이다.

똑똑하다는 말보다 친구를 아끼고 늘 웃는 아이라는 것이 더 감사하다.

 

엄마, 아빠, 오빠, 언니 사랑 듬뿍 받고 잘 컸구나...

새삼 오래 애쓴 나도 토닥토닥 격려하고 있다.

이게 다 막내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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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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